탈색을 여러 번 한 황금색에 가까운 생머리, 조금은 촌스러우면서도 사랑스러운 커다란 리본이 달린 검은색 헤어 밴드를 하고 작은 꽃무늬가 여기저기 박힌 남색 원피스 차림의 엠마는 그녀가 다니는 대학교의 로비 끝 구석에 앉아 공강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녀는 바로 오늘 아침, “이제 전 세계의 모든 화폐는 없어지고 눈물로 화폐를 대신하는 제도를 도입한다.” 는 뉴스를 본 참이었다. 엠마는 믿기지 않는 현실에 앞으로 어떻게 대비해야 하는지 인터넷을 도배하고 있는 비슷비슷한 기사들을 닥치는 대로 보고 있었다.
몇 십분 째 20개가 넘는 기사를 읽어봐도 눈물 화폐에 대한 더욱 자세한 정보가 나오질 않자 엠마는 그녀의 커다란 가방 안으로 핸드폰을 던지듯이 집어넣어버렸다. 그리곤 학교 로비가 푹 꺼져라 한숨을 깊게 쉬며 고개를 들어보니 2층에 사람들이 잔뜩 나와 있었다.
한눈에 로비가 다 내려 다 보이게 뻥 뚫려 있는 2층 공간에서는 여기저기 학생들과 교수님들이 두세 명씩 그룹을 지어 이 말도 안 되는 새로운 화폐 시스템의 관한 이야기로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중 몇몇은 눈물 화폐를 받아 드릴 수 없다며 씩씩거렸고, 몇몇은 갑자기 찾아온 당황스러운 현실에 초점이 없는 눈동자로 옆에서 씩씩거리며 욕을 잔뜩 하고 있는 사람들의 입만 멍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순간, 여기저기서 동시에 각양각색의 핸드폰 알림 음과 진동 소리가 로비와 2층 공간을 가득 매웠다. 사람들은 모두 이야기하는 것을 멈추고 부랴부랴 각자 핸드폰을 꺼내서 메시지를 확인했다. 엠마 역시 2층 사람들에게 향했던 시선을 거두고 이것저것 소지품이 잔뜩 들은 커다란 가방 안에서 띵! 띵! 을 연신 반복하며 알림을 울리고 있는 핸드폰을 겨우 찾아내 메시지를 확인했다.
[눈물 트레이닝 센터]
친애하는 엠마님
새로운 화폐 시스템의 이해와 도입을 위하여 무료로 교육을 지원하고자 합니다.
11월 10일 14시 20분 예약 있습니다.
신분증 지참 후 눈물 트레이닝 센터 41 Macrossan street (마크로산 스트리트)로 방문하시면 등록 및 교육 안내를 받을 수 있으며 변경을 원하는 경우 연락 바랍니다.
신규 교육 담당자 Sue.
엠마는 난독증에 걸린 사람처럼 길지도 않은 메시지를 또 읽고 또 읽어 자신의 눈에는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있었다. 살짝 고개를 들어 곁눈질로 양 옆을 보니 다른 사람들도 자신의 핸드폰 속 메시지를 또 읽어보고 또 읽어보며 자신들의 눈을 의심하고 있는 듯했다.
그때 오래되고 촌스러운 레이스 블라우스와 밑단의 실밥이 한 개정도 덜렁덜렁 거리는 검은색 바지를 입은 붉은 갈색 머리에 케렌 교수가 로비로 내려왔다. 엠마는 그런 케렌을 발견하자마자 로비에 가득 차 있는 학생들 사이를 비집고 앞으로 나아가며 켈렌을 크게 불렀다.
“교수님! 케렌 교수님!” 자신을 부르는 다급한 목소리에 케렌은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환하게 웃으며 엠마를 맞아 주었다. “오! 엠마! 마침 너를 찾고 있었어! 오늘 기분은 어떠니? 뉴스 기사 봤니?”
평소 케렌을 친엄마나 친 이모쯤으로 생각할 만큼 좋아하는 엠마는 두 팔을 크게 벌려 그녀를 안으며 대답했다. “교수님! 저 찾으셨어요? 아! 우선 제 기분요? 오늘 저 기분 좋아요! 뉴스? 뉴스도 봤어요! 너무 황당해요”
케렌은 자신보다 키도 작고 몸집도 작으면서 자신을 안겠다고 대롱대롱 매달려 자신이 물어본 질문에 쫑알쫑알 밝게 대답하는 엠마를 흐뭇한 미소로 바라보며 꼭 안아주며 대답했다. “엠마! 시간 있니? 내 방에 가서 차 한잔 하는 게 어때?” 엠마는 긍정의 답으로 케렌을 바라보며 크게 고개를 두 번 끄덕였다.
엠마가 케렌을 매우 좋아하고 따르기에 카페에서 케렌을 자주 만나 학교생활의 고충이나 친구 관계의 대한 푸념을 늘어놓은 적은 많았지만 직접 그녀의 사무실을 가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케렌 교수의 사무실은 2층 세 갈래로 나뉜 복도에 왼쪽 길 제일 끝 방이었다. 반투명한 유리로 되어있는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햇살이 아주 잘 들어와 기분이 참 좋아지는 것 말고는 별다를 것 없는 공간이 눈 앞에 펼쳐졌다. 케렌은 엠마에게 대접하기 위해 바로 차를 끓이려 사무실 한편에 준비되어있는 티 캐틀(Tea cattle)에 물을 올리고 저번에 선물 받은 고급 차 세트에서 얼그레이 티백을 2개 꺼내 컵에 담고 물이 끓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케렌이 차를 준비하는 동안 엠마는 천천히 그녀의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평소 담백하고 소탈한 그녀의 성격과 꼭 알맞게 사무실 내부는 매우 평범했다. 학교에서 제공해준 책상과 책장 그리고 의자 외에는 그 어디에도 그녀의 취향이 묻어 있는 색다른 물건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나마 제일 눈에 띄었던 것은 약간의 뽀얀 먼지가 쌓인 책상 위 액자의 들어있는 가족사진 두 장이었다. 그녀의 남편과 두 딸이 사진 안에서 활짝 웃고 있었는데 지금의 케렌의 모습과 다르게 매우 젊었기 때문에 꽤 오래된 사진일 것이라고 엠마는 짐작했다.
엠마와 케렌사이에 따뜻한 얼그레이 티 2잔이 놓여 있고 침묵은 케렌에 의해서 깨어졌다.
“엠마, 요새는 좀 어때? 아직도 눈 감으면 불쑥불쑥 튀어나오고 그래?” “네, 똑같아요” 엠마는 이 고질적인 문제로 케렌에게 꽤 오랫동안 상담을 받아오고 있다. 케렌은 엠마가 다니는 국제관계십 학부에 심리학 교수이기 때문이다.
엠마는 어렸을 때부터 상상력이 풍부했고 공상을 좋아했으며 미리 꿈을 통해 미래의 일들을 예견해서 보는 일도 많았었다. 하지만 예민한 거에 비해 본인이 예민하고 조금은 특별하다는 걸 인지하는 부분에서는 매우 둔했던 그녀는 전혀 자신에게서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잠을 자려고 막 눈을 감는 순간 아직 잠들지도 않았는데 눈 앞에 온갖 이미지들과 망상들이 떠다녀 잠을 못 자고 있었다.
물론, 아주 밝은 대낮에도 문뜩문뜩 누가 춤추는 장면이라던지 갑자기 우스꽝스러운 캐릭터가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던지 하는 다양하고 랜덤 한 주제의 이미지와 영상들이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는데 유독 올해는 잠들기 직전에 눈을 감으면 영화 필름이 돌아가는 것처럼 수많은 이미지들과 장면들이 끊임없이 이어져 나타나 그녀를 계속 괴롭혀 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 이미지들이랑 장면이란 것들이 엎친데 덮친데 격으로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괴물이나 귀신 혹은 다양한 종류의 잔인한 것 끔찍한 것들로 가득 채워져서 자려고 눈을 감은 엠마를 다시 눈뜨게 했고 다시 눈을 감으면 떠오를 장면들이 겁나 계속 잠을 못 자는 불면증 상태로 접어들게 만들고 있었다.
계속해서 그런 일들이 일상에서도 반복된다는 엠마의 대답에 케렌은 고개를 두 번 끄덕이고 괜찮다는 따뜻한 눈으로 엠마를 바라봐 주었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뭔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누가 한 번도 만진 적이 없어 보이는 아주 빳빳하게 날이 서있고 약간 두께감이 있는 하얀 종이 한 장을 엠마 앞에 내려놓았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아래 항목에 답해주세요. (너무 깊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a.지루하거나 자극적이지 않은 것을 견딜 수 없다. Yes or no
b. 배우처럼 타인의 감정에 쉽게 이입할 수 있다. Yes or no
c.언제나 항상 새로운 아이디어와 계획이 넘쳐난다. Yes or no
d.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공감을 잘할 수 있다. Yes or no
e.비현실적이고 터무니없는 흥미로운 생각을 한다. Yes or no
f.장면들이 종류에 상관없이 막 떠오른다. Yes or no
엠마는 질문지를 한번 쑥 훑어본 뒤 도대체 이걸 왜 나에게 줬냐는 의미로 일부러 눈을 아주 커다랗고 튀어나올 것같이 치켜뜨며 케렌을 쳐다보자 케렌은 씩 웃으며 “그냥 재미로 한번 해보는 거야”라고 했다.
엠마는 터질 것 같이 크게 뜬 눈을 다시 실눈으로 가늘게 만들며 케렌을 흘겨보았다. 그녀가 절대로 그냥 재미로 시키는 건 아닐 거라고 생각했지만 누구보다도 카렌을 존경하고 좋아하는 엠마는 그냥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해주기로 했다. 교수님이 또 어디 가서 기념품으로 받아 온 “전국 심리학부 교수 세미나”라고 적혀 있는 케렌의 펜을 빌려 준비되어있는 질문들을 깊게 생각하지 않고 Yes와 No 중의 거침없이 맘에 드는 답을 골라 작성해 내려갔다. 아주 짧은 질문들이었고 워낙 깊게 생각하지 않고 대답한 덕분에 모든 항목들을 금방 작성해 케렌에게 건넸다.
할 일이 없어진 엠마는 다 식어가는 얼그레이 티를 홀짝홀짝 거리며 케런에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케렌은 한동안 말없이 엠마가 작성한 항목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벌써 다 읽었어도 천 번은 더 읽었을 시간인데도 케렌은 종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엠마는 케렌을 다그치거나 질문을 하지 않고 조용히 그녀가 입을 떼기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드디어 케렌이 입을 떼었다 “재밌다.” 엠마는 그다음 말이 나오기를 기다렸지만 케렌은 두 손을 턱에 괴고 엠마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웃기만 할 뿐 더 이상의 말은 덧붙이지 않았다. 황당한 엠마는 “정말 재미로 하신 거라고요?”라고 공손하지만 약간 불손한 억양으로 케렌 교수가 자신을 놀리고 있음에 불편함을 표현했다. 케렌은 더 이상 엠마를 놀리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아 미안 미안! 하지만 정말 그냥 해본 거야 별 뜻은 없으니 신경 쓰지 마”라고 했다.
바퀴가 4개가 달린 회전의자에 앉아 있던 그녀는 의자를 갑자기 180도로 휙 돌린 뒤 앉은 상태로 다리를 바닥에 짚으며 엉금엉금 걸어가 책장 맨 위에서부터 네 번째 칸 17번째에 꽂혀있던 책을 펼쳤다. 왼손으로는 책 맨 마지막 페이지를 잡고 오른손으로는 그녀의 적갈색 머리를 살짝살짝 날리게 하는 바람을 만들어내며 책 전체를 훑고 있었다. “이게 어디 갔지?”라고 중얼거리며 한참 동안이나 책을 휘리릭 처음부터 끝까지 펼쳐보는 것을 반복했다. 그렇게 5번쯤 책 안을 살피던 케렌은 책의 중간쯤 되는 페이지에서 아주 작은 은청색 티켓을 하나 꺼내어 엠마에게 내밀었다. 티켓은 검지 손가락 두 마디 정도로 아주 작았는데 고급스러운 문양의 테두리로 장식이 되어 있었고 티켓 정중앙에는 아주 작은 글씨로 무언가 적혀 있는 것 같았다.
이번에도 엠마가 아까 설문항목이 적힌 종이를 받았을 때처럼 크고 튀어나올 것 같은 황당함에 가득 찬 눈동자를 만드려고 하자 케렌이 얼른 말을 하여 엠마가 눈을 그렇게 뜨지 못하도록 했다.
“엠마 너도 눈물 트레이닝 센터에서 온 메시지를 받았지? 나보다는 네가 더 이 티켓이 필요할 것 같아서.”라는 말을 덧붙였다. 엠마는 오늘 하루 종일 평소와는 너무 다른 케렌에 모습에 적지 않게 당황했지만 길게 이유나 상황을 꼬치꼬치 따져 묻지 않고 그저 자기가 최고로 믿고 의지하는 스승에게 알겠다고 대답하며 티켓을 받아 든 뒤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케렌의 사무실에서 나온 엠마는 그녀가 준 은청색 티켓을 내려다보며 티켓 정중앙에 아주 작은 글씨로 쓰여있는 글자를 읽었다. Seize an opportunity (기회를 잡아라). 그녀는 이게 뭔지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한번 으쓱해 보인 뒤 티켓을 아까부터 들고 있던 책 중앙에 끼어 넣고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