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숭아 한 알
"와, 복숭아다!"
아이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문장 만들기 미션을 완수하고 쟁취한 장난감 통에서 복숭아가 나온 것이다. 핑크색 쫄바지와 티셔츠에 핑크색 가방을 차고 핑크색 머리핀을 꽂은 희연이는 연분홍빛 복숭아를 손에 들고 발그레 웃고 있었다.
희연이는 복숭아를 집어 들고 똑 떼어 반으로 갈랐다. 그 나이대 아이들이 으레 그러듯 복숭아를 잘라서 먹으려나 보다 했다. 아이들은 음식 장난감이 있으면 보통 요리하거나 먹는 흉내를 내며 노니 말이다. 역시나 두 손으로 복숭아를 야무지게 들고 냠냠 먹는 시늉을 했다.
"맛있다아."
"복숭아 맛있찌. 맛이 어때?"
나는 과일이 나온 김에 맛을 표현하는 낱말들을 알려주기로 했다. 복숭아가 어떤 맛이냐는 질문에 희연이가 대답했다.
"와, 씨다!"
"맞아! 복숭아는 맛이 시다~"
복숭아가 신맛이 난다는 걸 아는구나! 그런데 어쩐 일인지 계속 '시다'가 아니라 '씨다'라고 하는 거였다. 아직 마찰음 발음이 나온지 얼마되지 않은 터라 시옷을 쌍시옷으로 잘못 발음한 것일 수 있었다. 나는 아이가 따라 말할 수 있게 정확한 말소리를 들려주었다.
"/씨다/ 아니고, /시다/"
"와, 씨다 씨!"
"/씨/가 아니라, /시/. 자, 따라해봐. /시/ "
"와, 씨다 씨!!!"
의아했다. 희연이는 내 눈을 보면서 점점 목소리를 높이며 계속 '씨다'라고 발음했다.
'분명히 쌍시옷 발음을 뗐는데,' 속으로 생각했다. '쌍시옷 발음을 다시 잡아야겠군.'
치료 일지에 '/ㅅ/을 /ㅆ/으로 대치함'이라고 메모를 남겼다.
그러나 다음 순간 아이의 행동에 나는 기가 탁 막혔다. 희연이는 복숭아를 손에 꼭 쥐고서 갑자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씨씨 씨를 뿌리고
꼭꼭 물을 주었죠
하룻밤 이틀밤 쉿쉿쉿
뽀드득 뽀드득 뽀드득
싹이 났어요
그랬다. 아이는 복숭아 맛이 시다고 한 게 아니라, 복숭아 안에 씨가 있다고 감탄한 거였다.
내가 잠시 상황 판단을 하고 메모를 고치는 동안 노래는 2절, 3절로 이어졌다. 희연이는 이내 노래를 부르며 가사에 충실한 율동까지 선보였다. 꼭꼭 물을 주는 시늉을 하자, 예쁜 꽃이 활짝 피었다. 또또 물을 주자, 주렁주렁 열매를 맺었다. 정성스레 씨앗을 다루는 모습이 복숭아꽃보다 예뻤다.
"복숭아에 씨가 있었구나?"
"네! 복숭아 다 먹으면 씨 있어요."
희연이는 어디선가 배운 대로 씨앗이 자라서 꽃이 피고 나무가 되는 과정을 성실하게 설명했다. 선생님의 질문에 맞는 대답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확실하게 표현한 거였는데 바로 이해하지 못한 내가 야속했다. '선생님이 못 알아들어서 미안해.'
솔직히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복숭아에 씨앗이 있다는 사실을.
나는 복숭아를 '음식'으로만 여기고 있었다. 복숭아는 그냥 복숭아인데, '먹는 복숭아'로밖에 보지 못하였다. 너무 익숙해서 당연하게 다가왔고, 다른 가능성은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복숭아를 먹을 때면 복숭아 씨를 처리하는 게 퍽 번거롭게 느껴지곤 했다. 과육이 묻어 있지만 음식물 쓰레기도 아니고, 일반 쓰레기로 휴지통에 버리려니 냄새가 나서 날벌레가 꼬이고. 동심을 잃고 마음이 팍팍해진 나는 씨앗을 귀찮은 쓰레기로 인지하고 있었지만, 씨앗이란 본래 자연의 숭고함이 깃든 생명의 돌이다.
한 알의 씨앗은 땅 속에 뿌리를 내리고 땅 위로 고개를 들어 새싹을 낸다. 새싹은 무럭무럭 자라서 잎을 내고, 어느날 문득 어여쁜 꽃을 피운다. 자연이 주는 물과 영양분을 듬뿍 머금고 어느새 나무가 된다. 그리고 그 나무에서 자신과 똑닮은 씨앗을 품은 열매들을 주렁주렁 맺는다. 씨앗 하나가 새싹이 되고, 잎이 되고, 꽃이 되고, 나무가 되고, 열매가 된다. 내가 먹지 못하여 버린 복숭아 씨앗은 쓰레기통 속 연금술의 돌이었다.
그러므로 씨앗은 파내고 버리는 것이 아니라, 고이 꺼내어 땅에 묻고 물을 주어야 하는 것이다. 어린아이도 아는 사실을 미처 생각지도 못한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어쩜 이리도 인간 중심으로만 대상을 바라보게 된 걸까. 복숭아는 그냥 복숭아인데.
우리 어른들은 인간에게 도움이 되면 가치 있고, 쓸모가 없으면 쓰레기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인간에게 얼마나 많은 효용을 주느냐에 따라 세상 모든 것에 가치를 매긴다. 생명마저도 말이다.
내가 초등학생이었을 때 학교 앞에는 박스에 한가득 병아리를 팔았다. 병아리 한 마리는 300원이었다. 그 옆에서는 떡볶이를 종이컵에 담아 팔았다. 컵볶이 하나는 500원이었다. 어떻게 떡볶이 몇 개보다 살아 있는 병아리가 더 싼 것인지 항상 의문이었다.
어른들은 돈이 되는 것의 가치를 잘 알지만, 거저 주어진 것들에 대한 가치는 잊고 산다. 알에서 어찌 병아리가 태어나는지, 나무에서 어찌 열매가 열리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작은 복숭아 씨앗이 어떤 보물로 바뀔 수 있는지 그 경이로움을 기억하는 어린아이가 더 세상을 잘 아는지도 모르겠다.
하마터면 쓰레기 취급을 받을 뻔한 씨앗의 소중함을 일깨워준 희연이에게 고마웠다. 오늘도 아이에게 말을 가르치려다 오히려 한 수 배웠다. 나는 아이에게 지식을 주려 했으나 아이는 내게 지혜를 주었다.
매우 아이러니하게도 어린 시절 나는 치킨을 먹을 때마다 병아리를 생각했다. 배가 불러도 치킨을 절대 남기지 않으려던 배후에는 목숨을 바친 닭의 희생을 헛되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었다. 생명의 소중함을 기리면서도 치킨을 끊을 수는 없었던 내 나름의 철칙이었다. 복숭아도 안 먹을 수는 없겠지만, 다음에 복숭아를 먹게 되면 감사하는 마음으로 씨앗을 존중해 주리라 다짐해본다.
오늘 희연이는 과일 맛을 어떻게 표현하는지 말하지 못했다. 하지만 씨앗이 어떻게 과일이 되는지 말해볼 수 있었다. 열심히 노래하랴 율동하랴 복숭아빛으로 상기된 볼이 사랑스러웠다. '맛이 어때?'라는 질문에 아랑곳 않고 '와, 씨앗이다'만 반복하던 너지만, 씨앗을 아끼던 그 모습이 연분홍 복숭아처럼 귀하다.
복숭아 맛을 표현하는 게 뭐 그리 중요한가. 지금 앞에 있는 복숭아를 느끼고, 즐기고, 행복하면 되었다. 맛에 대해서는 다음에 배우면 되지 뭐. 기왕이면 진짜 과일들을 사다 놓고 한 입 맛보며 단어를 배우면 좋겠다.
"선생님, 집에 갖고 가도 돼요?"
"복숭아 가져가고 싶어? 근데 다른 친구들도 복숭아 씨앗 심어보게 해주자."
"힝. 가져가고 싶은데."
"다음에 오면 또 꺼내줄게. 알았지? 복숭아 안녕. 무럭무럭 자라라."
"복숭아 안녕! 무럭무럭 자라라~"
복숭아 안녕.
무럭무럭 자라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