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입식 단어, 주입된 생각
오늘은 어휘력 검사를 하는 날이다.
'어휘'에는 이해할 수 있는 단어를 가리키는 '수용 어휘'와 스스로 말하고 사용할 수 있는 단어인 '표현 어휘'가 있다. 검사는 표현 어휘부터 시작한다.
검사 방식은 간단하다. 그림을 보고 연상되는 단어를 말하면 된다.
아이와 마주보고 앉아 그림 책자를 사이에 두고 검사를 시작했다. 아이는 대부분의 단어를 곧잘 말했다. 검사 중이므로 칭찬을 해줄 수는 없었지만, 속으로 기특해서 '그렇지!' '옳지!'를 연신 외쳤다. 그림이 한 장 한 장 빠른 속도로 넘어갔다.
'옳지.'
'옳지.'
한 장을 넘겨 다음 그림을 보여주었다.
"......"
아이는 처음으로 단어를 대지 못하였다.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말을 꺼냈다.
"......기분이 좋아요."
물론 그래 보이기는 했다. 그러나 정답은 아니었다. 나는 검사 지침대로 추가 질문을 했다.
"이 사람 몸이 어때?"
"......커요."
크긴 컸다. 하지만 여전히 정답은 아니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물어보았다.
"이 사람 몸이 어때 보여?"
"......안 귀여워요."
안 귀엽구나. 듣고 보니 일반적으로 귀엽다고 할 만한 그림은 아니었다. 속으로 웃음이 났다.
.
.
.
정답은 '뚱뚱하다'였다.
이 그림을 보고 답을 말하기 어려워하는 건 비단 이 친구뿐만이 아니다. 언어 검사를 많이 해봤지만, 유난히 엉뚱한 대답이 자주 나오는 그림이 있다. 그림의 문제라기에는 출제자의 의도가 꽤 명확하게 드러나는 편이다.
이제 막 단어를 배워가는 아이들은 대체로 물건의 이름을 말하는 '명사'는 쉬워 하지만, 모습이나 상태를 나타내는 '형용사'는 더 어려워 한다. 방금 전 '뚱뚱하다'처럼 말이다.
뚱뚱한 사람을 묘사한 그림을 보고 아이들의 표현은 각양각색이다. 그중 가장 빈번한 대답은 다음과 같다.
"커요."
"배불러요."
"배가 빵빵해요."
아이가 단어를 모르면 언어치료사로서 그 단어를 가르쳐줘야 한다. 그런데 왠지 '뚱뚱하다'를 가르칠 때에는 마음이 약간은 불편하다. 이 형용사의 사전적 정의는 이러하다.
뚱뚱하다
1. 살이 쪄서 몸이 옆으로 퍼진 듯하다.
2. 물체의 한 부분이 붓거나 부풀어서 두드러져 있다.
이 단어의 뜻을 가르치다 보면 필연적으로 '돼지'가 등장하게 된다. 돼지라 하면 으레 뚱뚱함과 게으름의 대명사다. 허나 사실은 돼지보다 인간의 체지방률이 더 높다는 것이 팩트이다. 배가 불러 있는 모양새는 하마, 코뿔소 등 비슷한 동물들도 있다. 하지만 뚱뚱한 동물은 돼지다.
또 실제로 돼지가 게을러서 살이 찐 건지 아닌지도 알기가 어렵다. 가축으로서 인간에 의해 좁은 우리에 갇혀 탐스럽게 살을 찌워야만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게으른 건 돼지다.
돼지에게 미안해지는 대목이다. 어쩌다 아이가 "돼지는 왜 뚱뚱해요?"라고 물어볼 때면 꽤 난감하다.
나아가 정확한 개념 이해를 돕기 위해 반대말을 함께 제시하려면 더욱 난감해진다. 뚱뚱한 사람과 날씬한 사람을 비교하며 '이 사람은 뚱뚱해', '이 사람은 날씬해'를 알려줘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체로 학습을 위해 활용되는 사진에서 뚱뚱한 사람보다는 날씬한 사람이 훨씬 매력적으로 묘사되곤 한다.
이쯤 되면 합리적 의문이 든다. '뚱뚱하다'라는 언어를 배우면서 뚱뚱함을 인지하게 되는 건 아닐까. 나도 모르게 뚱뚱함이 어떤 것인지, 그 상태가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에 대한 사회적 기준을 주입하는 것은 아닐까 궁금해졌다.
형용사는 성질이나 상태를 나타내는 언어다. 어떤 대상의 성질이나 상태에 대한 판단은 주관적인 것이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암묵적인 기준이 분명히 존재한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라면서 그 기준을 배우게 된다.
어쩌면 내가 지금 보고 있는 저 사람에 대한 나의 생각도 주입식 단어를 통해 주입된 생각일지 모르겠다.
뚱뚱하다, 날씬하다, 예쁘다, 못생겼다,
착하다, 나쁘다,
어쩌면 좋다, 싫다 까지도.
오늘 검사한 아이는 '뚱뚱하다'를 의도한 그림을 보고 "안 귀여워요."라고 했다. 안 귀엽다는 말이 나오게 된 배경에는 혹시 이 노래의 영향이 있었을까? 대한민국 어린이라면 모두가 아는 노래가 있다.
아빠 곰은 뚱뚱해.
엄마 곰은 날씬해.
애기 곰은 너무 귀여워.
으쓱으쓱 잘한다.
곰 세 마리 노래 가사에 따르면 아빠는 뚱뚱하고, 엄마는 날씬하고, 아기는 귀엽다. 곰돌이 가족을 묘사한 형용사로 유추해보면 엄마는 안 뚱뚱하고, 아빠는 안 귀엽다는 뜻일지도 모르겠다.
어린 시절에 아빠 곰의 빵빵한 배와 엄마 곰의 에스라인을 표현하는 율동과 함께 재롱을 떨면 으쓱으쓱 '잘한다'는 칭찬을 받았다. 인생 경력 5년차였던 그 때는 보고 들은 대로 그냥 따라한 거였지만, 삼십 년 넘게 살면서 사회가 강요하는 틀에 몸서리 쳐본 적이 있는 지금은 사뭇 다르게 다가온다.
어린이들이 수없이 부르는 동요에도 스테레오타입이 숨겨져 있다. 고정관념이라고도 하는 이 용어는 특정한 대상에 대하여 많은 사람이 공통으로 가지는 견해와 사고 방식이다. 고정관념이 깃든 동요는 주입식 교육을 부르고, 그것은 다시 고정관념을 재생산한다.
아빠 곰을 보고 멋진 몸이라고 주장하거나 아기 곰을 보고 안 귀엽다고 말하기 힘든 사회에서는 자유롭게 살아가기가 어렵다!
고정관념이 생기면 다양성에 대한 존중이 희석될 수 있고, 언어와 사고, 행동이 고정되어 창의성이 발휘되기가 어렵다. 그래서 우리는 객관적이면서도 융통적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만 한다.
세상의 모든 개념에는 그것을 표현할 언어가 필요하다. 그래서 '뚱뚱하다'라는 단어는 필요하다. '뚱뚱하다'라는 단어 자체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뚱뚱하다'는 단어에 어쩐지 부정적인 느낌이 묻어나는 건 부정할 수 없다. 이는 뚱뚱한 사람의 잘못이 아니다. 그저 뚱뚱한 것이 좋지 않다고 여기는 사회적 인식에 익숙한 탓이다.
예전에는 하나를 알려주면 스펀지처럼 잘 흡수하는 아이가 기특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나는 아닌데"라고 반대 의견을 내거나 "왜요?"라고 질문하는 아이가 눈에 들어온다. 세상이 주입하는 생각을 거부하고, 떠먹여주는 지식에 대항하여 스스로 사고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어휘력 검사를 마치고 얼마 후, 치료 시간에 아이에게 단어의 뜻을 설명해주었다.
나의 노력이 헛되지 않게 아이는 뭔가 깨달은 듯 해보였다.
"아~!!!"
"무슨 뜻인지 이제 알겠지?"
아이는 확신에 차 말했다.
"우리 엄마가 뚱뚱해요!"
'...제발 엄마한테 가서는 그렇게 말하지 마...'
역설적이게도 사회적으로 소통하기 위해서는 '뚱뚱하다'는 단어에 묻어나는 함의를 느끼지 못하면 안 된다. 혹시 누군가에게 의도치 않게 실수를 할 수도 있고, 누군가 악의적인 의도로 자신을 놀리려 하는 말에 헤헤 웃으면 안되니까.
사회 속에 살아가면서 온전히 순수한 상태로 머무르기는 어려운 일이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정확히 아는 것과, 앎에도 불구하고 자유롭게 사고하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언어를 가르치며 혹시라도 아이가 자유롭게 사고할 권리를 침해하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이도, 나도, 주입된 생각을 내 것으로 착각하지 않을 수 있게 항상 깨어 있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