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어느 날 땅이 꺼지고 벽이 나에게 내려왔다.
신축 빌라 2층으로 이사했을 당시 유행하던 노래 가사에 "2000에 50"이라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
사촌언니가 해준 말이다. 그 당시 잘 나가던 여자는 2000/50에 산다는 내용이었던 것 같다.
의도치 않게 나는 2000/50인 집에서 살게 됐다. 부엌에 긴 창문이 있는데 겨울에 눈이 오면 정말이지 너무나 낭만적이었다. 필로티 구조였지만 신경 써서 지었다더니 바닥도 차갑지 않았다. 거실에 어울릴 예쁜 아이보리 시폰 커튼도 주문했다. 안방은 넓고 작은 방에는 작은 베란다가 있어 세탁기와 재활용 쓰레기를 두었고, 가끔 학생들 있을 때 상담전화가 오면 그 작은 베란다에서 조용히 상담하기도 했다. 아! 정말 필요했던 장롱도 장만했다.
색깔이 다양한 테이블과 의자를 구입했고, 이전에 다니던 중고등 학생들이 더 나은 환경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막내이모의 막내아들이자 내 외갓집 막냇동생과 친구들을 모아 초등학생 한 반을 만들었다. 그중 막냇동생과 두 명의 아이들은 내가 초2부터 고3까지 견인하게 하며 마찬가지로 10년을 버티게 해 준 은인들이다.
그리고 며칠 후,
잠을 자려고 누웠는데.. 갑자기 바닥이 아래로 꺼지며 내 몸이 내려갔고, 눈앞의 벽이 내 위로 스르르 쓰러졌다. 내가 이 말을 주변 사람들에게 하면 당연히 이해를 못 한다. 그런데 정말 그랬다. 이상하게 기분이 허망했고 매일이 행복해야 하는데 허망함에 사로잡혀서 오히려 괴로웠다.
오랫동안 원인을 탐구한 끝에 알게 되었다. 이전의 원룸에서 2년인 줄 알았는데 1년 만에 탈출하게 되었고 뜻밖의 새 집으로 오면서 그토록 바라던 일이 너무 빨리 이루어지다 보니 갑자기 허무함이 밀려온 것이었다. 원인을 알고 나니 조금 나아졌지만 그 후에도 일이 조금 버겁기도 하고 혼자 사는 게 만만치 않구나 싶은 시간을 좀 보냈다. 그래서 이번에도 과감히 박차고 나가..
새끼 시츄 한 마리를 업어왔다.
(이 세상에서 제일 못생긴 강아지는 시츄라고 생각해서 딱 한 마리 있던 시츄를 쳐다도 안 봤는데 직원이 한번 보시라고 안겨주는 순간! 내 눈에서 하트가 나와 고대~로 우리 집으로 모셔왔다. "헉! 시츄가 이렇-게 예뻐요????????" ) 이 생명체는 곧바로 내가 살아야 할 이유를 줬고, 지금도 할머니 약용샴푸와 사료값을 위해 멈추지 않고 일하고 있다. 그래야 한다.
정신과병원에서는 우울증 약을 처방해 줬었다. 그 후로도 두어 번 더 찾아갔던 병원이다. 매번 약이 맞지 않아 수업을 해야 하는데 잠이 너무 많이 쏟아지고, 이가 계속 세게 물려서 자고 일어나면 잇몸이 아플 지경이었다. 이제는 찾아가지 않는 병원이다. 약간 코미디 같이 매번 의사 선생님이 너무 우울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