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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신혜 Jul 27. 2021

어중간한, 늘 어중간한..

어중간하다.

그것이 내 위치다.

처음 요가를 시작했을 때,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26살이었다.

봉일천의 토파즈 상가 지하 2층 아파트 커뮤니티 센터였다.댄스도 하는 홀이었는데 댄스 수업은

이제 안 하는듯했다. 파란 조명과 사이키 조명이 달려있었지만 틀어진 것을 보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몸숨맘 요가원에서 내가 제일 나이가 어렸다.

그리고 출산 직후라 관절이 유연해진 탓(?)에 동작으로 보면 같이하던 5-60대 언니들보다 쑥쑥 느는 것처럼 보였다.


어디에 가서도 제일 동작(아사나)을 잘했다.

그때 즈음 명상을 통해 밝은 빛을 보기도 하고,

저절로 흔들리는 몸 등등 여러 가지 눈에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변화, 신기한 현상도 많이 겪었다.

내가 진짜 원하는 삶이란 뭘까 혹은 내가 스스로 되고 싶은 어떤 ..생각을 끊임없이 했다.

어릴 때 상처받은 것들을 자꾸 끄집어내어 생각하고 명상하고 했다.


선생님이 공부하신 요가문화원 안국동에 지도자 과정을 한다고 나한테 가보라고 하셨는데 나는 생각은 있었으나 1년의 긴 과정이 현재 나의 상황에 어려울 거 같아 그저 염원으로 끝내었다.


몇 년 후 운정 신도시로 이사를 하였다.

차로 가면 다니던 요가원까지 30분이면 가는데,

버스를 타니 같은 파주에서 세 번을 갈아타야 했다.

당시에 나에겐 차가 없었고,

어린애들을 양육하며 왕복 2시간이 걸리는 요가원까지 가자니, 좋은 핑곗거리(합당한 이유)가 없다.


근처에서 요가원을 찾아보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운정에 요가원은 핫요가원 하나밖에 없었다.그곳에 한 달을 등록해 다녔다.

나의 스케줄은 당시 주부였기에 오전에 애들 어린이집 보내고 수련한 뒤에 집에 와서 해야 할 일들을 했다.

핫요가원의 선생님은 좋으셨는데 한 회원분이 나만 빼고 다른 회원 모두에게 말을 건다.

불편함을 느껴 등록 일자까지만 다녔다.

사실 지금도, 오전 수련을 꾸준히 해오고 아이를 둘 양육하고, 주장 강하신 엄마랑 살아오며

그분들을 웃으면서 강강약약하게 하지만, 그게 내 색은 아니라 에너지가 많이 소모된다.

그래서 오전 수업하던 것도 휴식기를 가지게 된 것이다.


그 후에 알아보다 집 앞에 주민센터에 다녔다.

아무래도 장소 특성상 피트니스 적인 게 많을 수밖에 없었지만 선택지가 좁았다.

그 선생님은 요가 수업 전에 사람들이 들어오는 시간에 음악과 함께 항상 그루브를 타고 계셨다.

그러다 며칠 뒤에 한 분이 춤 좋아하시냐고 하니

본인은 춤을 더 좋아한다고 요가는 정적이라고,

애들한테 요가보다 발레나 춤 가르치라고 했다.

그게 불편해서(선생님께 요가가 1순위가 아닌 것) 또 결국 기간까지만 다녔다.


나는 요가는 남녀노소 모두에게 좋다고 생각하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보완할 운동을 제시할 수 있지만 역시 요가가 최고인 것이다.

적으면서 돌아보니 참 고지식하고 고집스럽게 요가에 미쳤었네 싶다.

아마도 지금의 나처럼 요가를 말하는 사람을 그 시기에 만났다면  아 저 사람 나이롱이네 ㅡㅡ 하면서 슬금슬금 멀어지려 했을 것이다. 적으면서 재밌어서 웃음이 난다.


아무튼 그렇게 중단 후 다시 요가로 검색하니 멀지 않은 교하에 드디어 요가원이 생겼다.(지금은 고양시 삼송으로 가셨다.)

바로 체험을 등록했다. 작은 요가원이었고 원장님이 그린 노란 태양 같은 벽의 그림이 아직도 선명하다.

당시에 수업을 듣고 명상, 요가 동작, 마음, 아 이 정통(?).. 얼마나 그리웠던가..


바로 등록하고 꾸준히 오전 수업에 참여했다. 그리고 원장님이 지도자 과정을 시작한다고 하여 1기로 등록을 하게 된다.

떨림과 설렘이 공존했다.

잘할 수 있을까? 내가 ...?


하지만 지도자 과정에 대한 염원과, 진플로우 원장님의 세련된 수업과 철학이 닮고 싶다는 욕망이 강했고,

특히 그전에도 수많은 지도자 과정을 알아봤지만 2달 수강으로 뭘 알려준다는 건지 모를.. 과정이 대부분이었다.

여기선 6개월 과정이라고 했다. 바로 등록을 하고 그렇게 지도자 자격증을 따게 되었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 상처 등등 회복된 줄 알았던 많은 것들이 이때 놓아지게 되었다.

원장님이랑 대화만 하면 뭐가 그리 서러운지 매일 울었다. 나중에는 원장님이랑 정말 친한 친구 같은 사이가 되었다. 같이 살아가면서 아이 키우면서 그런...


아무튼 지도자 과정을 거쳐 요가 지도자 자격증을 따게 되었다. 그때 쯤이었을까 ? 인스타그램이 사진 보정 프로그램에서 뭔가 SNS의 기능으로 우리나라에서 활발해지기 시작한 게.


나는 그즈음 우물 안 개구리 임을 깨닫게 되었다. 세상에는 동작으로 뛰어난 사람이 너무나도 많았다.


당시 나와 친하게 지내던 Y 샘께서 파트 강사 자리를 나에게 물려주고 임신 준비로 떠나시게 되었다.

Y 샘은 늘 나의 열정에 대해 많이 칭찬해 주시던 분이다. 그때는 몰랐는데 그때의 나는 내가 봐도 참 지독한 요가 광인이었다.


아무튼 당시에 하면 된다!를 기반으로 아사나 수련을 지독하게 하고 있던 때인데,


Y 샘이

 "샘은 스스로 가지고 있는 색이 뭐라고 생각해요? 그런 생각 해본 적 있어요? 나는 아무래도 오래 하다 보니 내가 이런 부분은 잘 맞고 이런 부분은 불편한 거 같아요. 그래서 전 이런 수업을 해요" 하신다.


나는

"글쎄요,,? 그냥 이렇게 하다 보면 제가 하고 싶은 동작도 하고 경력도 이론도 쌓이고 어느 순간 강사의 강사가 되어있지 않을까요?"


Y 샘은

"그래요? 그럼 선생님 얼마 전에 드랍백 컴업 성공했지요? 하고서 뭔가 느끼고 바뀐 게 있어요?"

                                               



"..? 생각해 보니 없네요. 그냥 하루동안 좋았어요"..

사실 나는 그때 저 동작을 매우 갈망하고 원했기에

저 동작을 성공하면 얼마나 좋을까... 얼마나  세상을 바라보는 이치에 눈이 뜨일까 , 생각한 것이 사실이었다. 의문을 가진채였지만 그래도 계속 수련과 수업을 이어갔고, 무리한 깊은 수련들로 인해 허리 디스크로,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던 때도 있었다.

여러 가지 일련의 사건들 속에서도, 계속해서 나에 색에 대해 이야기했던 그날의 대화는 내가 가야 할 방향을 가리키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어중간하다.


유연하지도 않고 , 이젠 더 이상 고행스러운 수련도 하지 않는다.




나는 어중간하다.


그런데 세상은 다 그렇다. 우리가 보는 각 분야의 스타들은 0.01프로가 될까 말까 한 사람들이다.


많은 것들이 나머지 90%의 세계에서 더 활성화되어 돌아간다.


작은 하나까지도 없어서는 안 될 것들이다.


오히려 파주시의 한 지역에서 각자 스스로 주인공으로 살고 있는 삶에, 그들의 스케줄에 요가가 있다면,


요가 수업이 없어져서는 안 될 것이다.


화려한 보이는 면을 사람들은 쫓지만, 그것을 내 삶 곁에서 느끼게 해주는 건 지금 우리 작은 동네에 있는 것들이다.




나는 타고나길 뻣뻣한 체형에 요가를 하면서 유연해진 것이다.


누군가가 보이는 모습으로만 생각할 때는 이 정도만 해도 아프다고? 하겠지만,


허리 디스크와 뻣뻣한 몸으로 누구보다 회원들의 몸을 이해하는 강사가 된다.


우리 엄마가 유독 세신 탓에, 남들은 세다고 하는 회원도 내가 볼 땐 귀엽다.


지금은 그저 오늘 하루 시원하고 하루안에서 생활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어중간하다.


어중간 하다는것...


그것은 특별한 색이 된다.



어중간한거? 그게 뭐 어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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