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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신혜 Jan 21. 2019

알아차리는 것

요가 수련으로 찾아온 것들

알아차림이란 흥미로운 일이다. 요가를 할 때에도 알아차림을 중요시하곤 한다. 평소에는 딱 죽지 않을 만큼 쉬던 숨은 얕았음을 알아차리는 순간에 깊고 풍부한 호흡을 하려 하고, 둥글게 말린 척추와 등, 어깨를 알아차리면 이내 바르게 펴서 앉으려 한다. 또한 몸을 알아차리며 수련을 하다 보면 동시에 감정과 생각을 알아차리게 된다.
   
 나의 요가 수련도 알아차림의 연속이었다. 처음에는 동작을 할 때 눈에 보이고 만져지는 몸을 알아차렸다. 근육의 자극, 호흡하며 넓어졌다 줄어드는 옆구리, 갈비뼈, 갈비뼈들의 사이사이 라던가 하는. 그런데 수련을 할수록 내면의 감정이나 생각으로 알아차림은 확대되곤 했다.


그러면 과거의 슬픈 상처들이 떠오르곤 했는데, 몇 날 며칠을 수련 도중에 울기도 했고 혼자서 허공에 소리를 지르기도 했으며 평온하다가도 불같은 화가 치밀어 오르기도 했다.


신체적인 변화 또한 찾아왔다. 겨울이면 달고 살던 임파선 염이 더 이상 걸리지 않았다. 또한 만성 편두통도 말끔히 사라졌다. 산후 우울증도 지나갔다. 나는 그 후 요가에 푹 빠졌고 요가를 알려주신 선생님처럼 스스로를 사랑하는 내면을 누구나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어 요가 강사가 되었다.
   
어느 날에는 워크숍에 참석했다. 당시 선생님께서 “우리는 수업 중에 회원에게 좋은 공기, 좋은 에너지를 몸속 깊이 마시고 나쁜 에너지는 내쉬는 숨에 모두 뱉어내 보세요.”라는 말을 하지 않나요? 하고 물어보셨고, “어? 내가 하던 말이네”라고 생각했다. 이어서 선생님께서는 “물론 좋은 것을 나의 안으로 가져오라. 그 말도 잘못된 것 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을 살다 보면 슬프고 힘든 일들 또한 찾아옵니다. 항상 좋은 일, 좋은 것들만 머리와 가슴과 몸에 담을 수는 없지 않을까요? 원하지 않지만 슬픔과 아픔 부정적인 에너지를 받을 수밖에 없지요.

그래서 회원들의 요가 선배로서 우리가 거기에서만 머물러 보기보다 조금 더 넓게 봅시다. 나쁜 에너지가 생긴다면, 그것 또한 우리 안에서 정화시켜 보세요. 그리고 좋은 에너지로 바꾸어 숨을 뱉어내어 보는 겁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는 마치 머리를 맞은 듯 멍해졌다.

워크숍이 끝난 후에도 수련을 하거나 일상생활에서 선생님께서 하신 말이 생각나곤 했다.
   
얼마지 않아 알아차림의 순간은 섬세해지기 시작했다. 상황이나 아픔을 떠올리고 단순한 감정을 알아차리곤 했는데, 점점 감춰놓고 눌러놨던 감정들이 올라오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요가에 빠지며 스스로가 옳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어느 순간에는 정화된 몸이 세상의 안 좋은 것과 닿는 것에 거부감이 들었다. 극단적으로 채식을 했고 요가로 맺은 인연만 남겨두고는 모든 인간관계를 차단했다. 점점 더 가리는 것이 많아졌고 요가의 계율을 지키는 것에 대한 집착이 심하게 늘어갔다.


이것의 근원에는 빠르게 성장하고픈 욕심도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요가를 시작했을 때 클래스에서 젊은이는 나하나였기 때문이겠다. 게다가 과거의 아픔을 별나게 겪은 만큼, 정신적으로 진보한 사람이라는 오만함을 내심 담고 있던 것이다.

또한 단편적인 부분으로 사람들을 판단하고 평가했다.


생각이나 감정이 발생하면 머리나 가슴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을 수 없었다. 그런 과정은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일어났다. 한동안 그런 마음이 일었던 순간이 떠올랐다. 게다가 어제, 오늘 그리고 방금 전에 일어난 마음 등등 알아차림이 잦아지면서 스스로 위선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슬픔과 분노, 자괴감이 몰려왔다. 다른 곳으로 의식을 돌려 피해보기도 했고 반대로 깊이 파고들어 합리화도 해보았다. 그러나 과거로 가는 생각과 마음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미 거기에 사로잡혀 있어 생각을 안 하려 할수록 오히려 생각을 하고 있는 집착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거기서 시작된 알아차림이었다. 그런 감정과 생각도 순간적으로 알아차릴 때 더 진행되지 않고 흘러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 후로 나는 채식을 그만두었다. 과식을 하지 않게 됐고  필요한 만큼 섭취 후 수저는 저절로 내려놓아졌다. 경건히 수련하는 분들이 잘못되었다는 글이 아니다. 그분들에게 충분히 존경심을 표한다.

그리고 그 신념을 존중하고 경의를 표한다.

단지 나는 그 길 보다 이 길이 맞을 뿐이라는 말을 더한다.

나는 아이도 있는 강사이다. 세속에 속세에 상당히 밀착해 있다. 더 이상 스스로를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다양한 모습들이 모두 나로 받아들여졌다.

누군가의 딸이자 엄마 , 그리고 친구이자 학부모,

요가강사이며 동시에 학생이었고

친구들에게도 어떤 친구들 사이에서는 재미있는 친구였고 다른 곳에서는 고리타분했다.

한 곳에서는 활발했고 또 다른 곳에서는 내성적이었다.

처음엔 스스로 판단한 나의 맘에 들지 않는 나의 모습은 내가 아니라 여기고 거부했다.

 진정한 내가 자유로이 날지 못함에 고뇌했으나, 나는 그때마다 여기 있었다.

어디도 가지 못하였으나 실은 어디든지 갈 수 있었다.

기쁨도 괴로움도, 앎도 무지도 모두 나의 역사이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까르마라는 것이 주어졌으며

그것을 거부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면 수용하고 그 지나온 과거들이 역사가 되었음을 본다. 그저 그뿐이다.

그 후로 나는 앞날에 대한 두려움이 줄어들었다.

지금 이 순간도 역사를 이루는 과거가 되어 흘러가고 있다.

그리하여 요즘은 삶과 요가는 공존해야 한다는 단순한 결론으로 살아가고 있다.

결국 우리는 지구에 존재하는 하나의 생명체임이.

들여다보면 같은 세포를 가졌음이.

양파 껍질처럼 하나하나 떼어내 보면 우리는 호흡만이 남는 하나였음을..

그러나 이 매력적이고 슬픈 동물인 인간이란 존재는 유동적이기에 정한 데로 흘러가지 않음이...


그래서 늘 어렵다. 어려운 일이다..

무엇 하나도 쉬운 것이 없다.
그러나 돌아보면 뿌듯하고 감사한 일이다.
외부가 아닌 내부가 부드러우며 굳건할 때 오는 만족감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것은 외적인 것을 채운 뒤 채 반나절도 안 가는 기쁨을 경험한 후에 얼마 안 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놓으려 그리 애를 썼지만 어느 날 스며들듯 놓아지는 때가 온다.
잡으려 그리 애를 썼지만 어느 날 스며들듯 공존하는 때가 온다.
그것은 명사나 동사로 정의할 수 없는 것..
사람이면서도 감정이고 흐르면서도 사물이며
감각이면서도 형체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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