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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님 Feb 18. 2022

30대의 터널엔 비상구조차 없다 (2)

#수험생활 7

“로스쿨 준비하시는 건 어떠세요? 취업 준비보다 로스쿨 준비하는 게 나으실 것 같은데요.”


로스쿨 최종 불합격의 아픔을 뒤로 한채 찾아간 교내 취업지원팀에서 들은 첫마디였다. 나는 최선을 다 했으나 이미 두 차례 불합격했고, 더 이상 어떤 노력을 더 해야 하는지, 그리고 더 할 수 있는지 알 수 없어 그만뒀다고 말하면서 눈물이 났다. 이미 지나간 불합격이 슬프거나 힘들었다기보다는 취업 준비를 시작도 해보기 전에 희망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로스쿨 입시만을 바라보던 나에게 인턴 경력이나 금융 3종 자격증 같은 '취업을 위한 스펙'이 갖춰져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런 데다가 나이까지 적지 않으니(이제 막 26살이 되었던 때였다.) 대기업은 커녕 이름을 알만한 그룹사명이 들어간 중견, 중소기업조차도 어려울 수 있다고 하였다.

하지만 운이 좋게도 취업 준비를 하면서 처음 맞이한 신입 공채에서 취업에 성공하였다. 서류 통과율이 높은 건 아니었지만, 서류가 통과되면 인적성도 합격하고 최종면접까지 볼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취업지원팀에서 흘렸던 눈물은 점점 잊혔던 것 같다.


조금만 더 해보면 더 좋은 회사에 입사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다음 공채 시즌이 시작되었을 때에는 당시 입사한 회사보다 더 좋은 회사 몇 군데를 선별해서 지원을 했다. 입사 첫 해에는 회사에 적응하려고 애쓰기보다는, 함께 입사한 동기들과 친해지려고 노력하기보다는 늘 방어적인 태도로 지냈다. 언제든지 떠날 수 있는 회사와 사람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부서 배치를 받고 본격적으로 업무를 시작하게 되면서 다른 회사에 지원할 여유가 사라졌다. 입사 동기들 대부분은 아직 업무를 받지 않았거나 사수에게 인수인계를 받고 있었지만, 나는 떠나간 선배의 공석을 완벽하게 채우기 위해 야근도, 주말 출근도 불사해야 했다. 인사담당자라는 자리는 취업 준비생들에게, 심지어 입사 동기들에게도 선망의 대상이었지만, 직접 겪어보니 인사는 정말 '잡무의 총집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자기소개서에 썼던 '입사 후 포부'가 얼마나 호기롭고 당돌했었는가. '전문가가 되겠다', '문제를 개선해나가겠다', '새로운 제도를 만들겠다'라니. 당시 다니던 회사가 아니라 더 좋은 회사에 다닌다고 하더라도 절대 이룰 수 없는 목표임을 깨달았다.


목표를 잃은 나는 '이직'이 아니라 '퇴직'을 결심한다.




#20대에 다시 터널에 들어가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퇴직 의사를 회사에 밝히고 난 후, 같은 팀 내 상사분들뿐만 아니라 옆 팀이나 옆 본부에 있던 팀장님들까지 많은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특히 우리팀 팀장님과 팀 내 과장님이 해주신 말씀들은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다.


"햇님씨, 제 와이프는 첫 직장이 증권사이었어요. 업무 스트레스도 많았고 적성에도 안 맞았기 때문에 이직을 결심했죠. 증권사에 들어갈 만큼 스펙도 좋았고, 그래서 충분히 좋은 회사에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퇴직부터 했어요. 그리고 두어 번 더 이직을 했는데, 결국 첫 직장만큼 좋은 회사에 들어가긴 힘들더라고요.

햇님씨가 계획한 일이 잘 되면 당연히 좋겠지만, 계획대로 되지 않았을 때 돌아갈 수 있는 곳이 없을 수도 있어요. 회사를 계속 다니면서 준비해보는 건 어때요? 원한다면 법무팀으로 부서를 옮겨줄게요."


"햇님아, 취업 준비 시작하고 금방 취업했다고 했지? 너 바로 다음 기수로 입사한 별님씨는 취업 준비만 1년을 넘게 해서 겨우 취업했다고 하더라고. 이전에는 계약직으로 있었대. 지금 일이 힘들고 적성에 잘 맞는지조차 모르겠지만, 그래도 지금 일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좋대. 넌 지금 퇴직하면 나중에 후회하지 않겠니?"


두 분께서 단순히 퇴직을 말리고자 하는 의도로만 하신 말씀이 아니라는 사실은 그때 당시에도 알고 있었다(물론 그 와중에 무조건, 특별한 이유 없이 퇴직을 말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늘 목표지향적으로 살아온 나에게는 더 이상 회사생활을 하는 미래의 내 모습이 그려지지 않았다. 언젠가부터 무기력하고 의미 없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래서 하루라도 빨리 회사를 벗어나고 싶었다.




회사 안에 있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가족들, 친구들 등 내 주변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퇴직을 만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처음 퇴사 이야기를 꺼낸 지 3개월 만에 결국 회사를 떠났다. 퇴직 후 나는 바로 '변리사 시험'을 준비하였다.

변리사 시험은 보통 이공계 출신들이 준비하는 시험이다. 특허는 공학적 원리에 기반한 산업재산권이므로 그 원리를 일정 수준 이상 이해할 능력이 없다면 특허 대리 및 관리 업무 수행도 힘들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공계 안에서도 특허가 많이 나오는 편인 전화기 즉, 전기전자공학과, 화학공학과, 기계공학과 전공이 유리하다. 인문계 출신 변리사도 상표, 디자인 업무는 가능하기 때문에 아예 변리사로 활동할 수 없는 것은 아니고 가능한 업무범위가 좁다는 의미다(출처 : 나무위키 "변리사").

고등학교 교육과정이 개편되고 인문계열은 '사회탐구영역'만, 이공계열은 '과학탐구영역'만 수능 과목으로 선택하도록 하면서, 인문계열 출신의 변리사 시험 합격은 매우 드문 일이 되었다. 1차 시험의 자연과학 과목이 인문계열 출신에게는 큰 걸림돌이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학부시절 저작권법과 상표법 수업을 들으면서 지적재산권에 대한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과감하게 도전해보자고 결심했다.


수험이라는 터널 안에 있는 것이 얼마나 불안하고 답답한 상황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다시 터널에 들어가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터널 안에는 비상구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딱 두 번만 시험을 보고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다면 다시 취업을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시험을 보는 횟수를 두 번으로 정해놓은 이유는 서른이 넘어서는 신입으로 다시 취업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회사에서는 신입 공채를 담당했었는데, 29살의 여성 신입 지원자의 임원 면접이 끝난 후 임원들이 작성한 평가 용지를 수거하다가(실무진들은 노트북으로 그룹사 면접평가 프로그램에 등급과 코멘트를 작성했지만, 임원들에게는 종이로 된 평가표를 배부해서 작성하도록 하였다.) 덜렁 나이를 의미하는 숫자와 엑스표만 있는 종이를 보고 충격을 받은 기억이 있다. 암묵적인 나이 제한을 눈앞에서 목격한 기분이었다.




호기롭게 시작했던 변리사 수험생활은 두 차례의 시험 응시 후 결국 실패로 끝났다.

다시 취업 준비를 시작하니 오히려 서류 통과율이 올라갔다. 경력직에 지원할 만큼 긴 경력이 있는 것이 아니어서 신입으로 지원을 했는데, 짧은 경력이라도 있는 것이  도움이 된 모양이었다. 그렇게 3년 전보다 훨씬 많은 면접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최종 합격은 쉽지 않았다. 29살의 나는 아침에 눈을 뜨면 책상에 앉아 채용공고를 보고, 이력서를 제출하고, 면접을 보면서 매일매일이 다르지 않은 1년을 보냈다.


이번 터널은 비상구를 통해 반대편 터널로 넘어가도 여전히 출구가 보이지 않았다. 최종 합격의 문턱에 항상 내 나이 29살에 엑스표를 긋는 누군가가 있는 것만 같았다. 실무진 면접과 달리 임원진 면접에서는 29살의 여성 지원자에게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 내 왼편에 앉아있던 지원자가 어떤 군생활을 했는지, 채용 예정인 부서에 있는 대리님은 오른편에 앉아있던 지원자와 같은 학교, 같은 학과를 졸업했다는 등의 TMI만 잔뜩 얻어 나왔다.


29살의 끝에 나는 다시 한번 절망감을 느꼈다. 첫 취업이 운이 좋았을 뿐이었는데, 나는 겸손하지 못했고 욕심을 버리지 못했다. 그렇지만 오만함과 욕심에 대한 대가가 이 터널에 갇혀 영영 빠져나가지 못하는 것이라면 너무 가혹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무엇을 바랐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은 과거의 선택이 후회가 되어서, 어느 날은 그래도 열심히 살아온 내가 안쓰럽고 내가 처해있는 이 상황이 너무 억울해서 눈물이 났다.

하지만 시험 전날에는 나보다도 잠을 설쳤던, 내가 힘들지만 않다면 언제 취업이 되든 기다릴 수 있다던 엄마를 생각하면 주저앉을 수가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노력은 내 마음을 내려놓는 것이었다. 첫 직장을 기준으로 지원할 회사를 정하는 일은 그만두기로 하였다. 얼마나 규모가 큰 회사였는지, 연봉이 얼마였는지는 생각하지 않기로 하였다.


새해가 밝았고, 마음을 내려놓은  처음으로 지원한 곳에서 최종 합격 통보를 받았다. 그렇게 나는 대학교 계약직 교직원으로 일을 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일을 하는 내내  직장의 팀장님과 과장님이 해주셨던 말씀이 귓가에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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