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험생활 15
1차 시험 전날에는 객관식 문제집에서 틀린 문제들만 훑어봤다. 이미 각 과목당 객관식 문제집을 2 회독을 마친 상태였고, 시험 전날은 틀린 문제 위주로 세 번째 회독을 할 계획이었다.
처음에는 많이 틀리는 부분을 헛공부한 것 같아 답답했다. 그런데 세 번째 회독에서는 오히려 많이 맞은 부분이 불안했다.
우리는 삶의 모든 부분에서 확신을 가지고 결정을 하거나 행동할 수는 없다. 과거에 이미 경험을 해본 것이나 충분히 연습이 된 것이라면 어느 정도 확신을 가지고 움직일 수 있지만, 처음 맞닥뜨리는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이 옳을지 혹은 좋을지 확신을 하기 어렵다. 앞으로 발생할 모든 일들을 예측하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아무리 미리 대비하고 준비하였다고 하더라도 언제나 확신을 가질 수는 없는 것이다.
특히 확신이 부족한 상태에서 좋은 결과를 얻는다 하더라도 마냥 기쁘지만은 않다. 그 결과가 실력 혹은 노력에 따른 정당한 대가가 아닌 잠시 내게 찾아온 행운이라서 금방 사라지거나 다시는 얻을 수 없을 것만 같기 때문이다.
시험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1차 시험 결과와는 별개로 그 준비과정에서 불안함을 느꼈다. 1차 시험 준비를 시작한 시점은 그리 늦지 않았으나, 1차와 2차 준비를 병행하는 과정에서 공부시간 분배에 실패했다. 1차 시험 직전 일주일을 제외하고는 항상 2차 공부가 우선이었다. 절대적인 1차 공부시간이 부족하니 1차 객관식 문제를 풀면서 정답을 확신하는 단계까지 도달하지 못한 것이다. 그나마 틀린 것은 한 번이라도 더 볼 수 있기 때문에 틀리지 않은 것이 오히려 더 불안해지는 사태에 이르렀다.
정답을 맞힌 것이 내 실력이 아니라 운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어느 정도의 확신을 가지고 정답을 맞혀야 다음 회독에서 또다시 읽어보지 않아도 될까? 정답이 아닌 다른 선지들의 잘못된 부분까지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어야 할까? 스스로에 대한 의심으로 실력이 아닌 운으로 맞힌 것이라 판단되는 문제들이 늘어가고, 다음 회독에서 다시 보아야 할 문제도 늘어났다.
나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말을 하는 것에 큰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 편이다. 학부시절에는 발표가 평가요소에 포함되는 과목들은 괜찮은 학점을 받았고, 첫 직장 수습기간 중 PT를 했을 때에는 50여 명의 동기 중 2등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결과들은 충분한 연습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미리 간략하게 말할 내용을 작성해보거나 몇 차례 시물레이션을 해보았고, 가능하다면 주변 사람들의 피드백도 받아보았다. 그 과정에서 발표 내용을 더욱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려는 노력이 있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내용을 정확하게 숙지하고 있어야 했다. 발표 후 어떤 질문을 받게 될지 예측할 수는 없었으나 거의 모든 질문에 막힘없이 대답할 수 있는 준비가 되었다.
전공수업 중 유일무이한 발표 수업이 있었는데(법학전공에서는 조별과제나 발표가 거의 없다. 틈틈이 보는 퀴즈와 중간고사 및 기말고사 시험이 학점에 반영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중간고사 대체 발표에서 좋은 학점을 받았다. 열심히 준비를 한 덕분에 발표 뒤 쏟아지는 질문들에 적절하게 대답을 하였고, 심지어는 칠판에 그림을 그려가며 설명을 하기도 했다.
같은 수업을 들었던 선배들이나 동기들의 발표를 보면 생각보다 긴장하는 사람들이 많고, 준비가 부족한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안일한 마음이 들었던 것 같다. 기말고사 대체 발표에서는 같은 수업 수강생들에게 배부해야 할 자료를 만들면서 따로 대본을 작성하거나 시물레이션을 해보지 않았다. 그랬더니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의 내가 단상 위에 서있었다. 발표를 듣고 있는 수강생들의 머리 위에는 물음표가 떠 있는 것 같았고, 그 표정들을 보고 있자니 내 목소리가 양의 울음소리처럼 떨려오는 것이 아닌가? 발표 자료를 들고 있던 손도 덜덜 떨려왔다. 그리고 발표 후 나온 질문들에 대한 답도 일부는 제대로 하지 못했다.
1차 시험은 객관식 문제집을 여러 번 반복해서 보다 보면(수험가에서 이 과정을 '눈에 바른다'라고 표현한다.) 감으로도 정답을 맞힐 수 있다. 꼭 문제은행식 출제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객관식 선지에 자주 등장하는 내용이나 교묘하게 바꾸어 함정을 파는 부분이 정해져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객관식 문제집을 충분히 '눈에 바르지' 못했고, 문제를 틀릴 때는 물론이고 정답을 맞힐 때조차도 확신하지 못했다.
논술형 시험인 2차는 각종 교수 저나 수험서, 사례형 문제집 등을 반복해서 보고 숙지한다 하더라도 완벽한 대비가 불가능하다. 매번 중요하지 않은 부분이나 학설의 대립이 없어 서술할 분량이 적은 부분 등이 불의의 타격(일명 '불의타')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하나의 사실관계에 대한 문제를 여러 개로 쪼개서 문제 형식을 낯설게 바꾸기도 한다. 각 문제마다 '서론(논점의 정리)-본론(법규정, 판례, 이론 등)-결론(사안의 해결)'의 형식을 갖추어야 하므로 문제가 많아지면 쓸 분량이 많아져서 수험생들 입장에서는 부담스럽다.
하지만 완벽한 대비가 불가능하다고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다. 실전에서 맞닥뜨리는 불의타 문제의 분량이나 형식을 고민할지라도, 그 외의 문제는 한치의 망설임 없이 써내려 가야 한다. 객관식은 답을 찍을 수라도 있지만 논술형은 아는 만큼 쓸 수 있다. 그래서 매주 학원에서 보는 모의고사는 좋은 연습 기회가 된다. 불의타나 어려운 수준의 문제를 만났을 때 대처하는 요령도 생기고,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 글로 써지지 않는 경험도 해볼 수 있다.
올해는 공부에 집중이 안 되는 날이 많았다. 매주 보는 모의고사 범위에 맞춰서 공부하다 보면 어쨌든 몇 번은 반복해서 해당 내용을 보게 될 것이므로, 지금 당장 완벽하게 암기가 되지 않았어도 이후에는 보다 완벽하게 암기가 될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열심히 공부를 해도, 모의고사를 잘 봐왔어도 실제 시험에서는 불합격할 수 있다는 사실도 의욕을 꺾는 원인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1차 시험은 좋은 자극이 될 것이다. 틀리지 않는 것조차 불안함을 느꼈고, 그 불안감은 내 실력과 노력에 대한 확신이 부족한 데에서 시작되었다. 성실하게 시간을 투자해서 충분히 반복해서 문제를 풀어봤다면 틀리지 않는 것에 불안함을 느끼기보단 정답을 맞힌 것에 대한 기쁨을 느꼈을 것이다. 정답은 실력과 노력의 대가라는 확신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2차 시험은 정답을 맞힌 기쁨과 합격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러기 위해서 주어진 시간을 충실히 보내며 충분한 연습의 과정을 가져야겠다고 다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