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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명 Mar 12. 2016

여행 중입니다(6)

“미쉘이 말한 그 집 가볼까?”

우린 숙소 맞은 편에 있는 햄버거 집에 들렀다. 호스텔 직원인 미쉘이 극찬했던 곳이었다.



미쉘은 호스텔과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그녀의 밝은 에너지는 보는 이들까지 미소 짓게 만들곤 했다. 우물쭈물하며 안내 데스크 근처에 가면 미쉘이 항상 먼저 말을 걸어줬다.

 

“헬로, 스위티. 하우아유?”

미쉘은 [O]를 길게 발음하는 특유의 말투로 인사를 했다. 영어를 잘 못해서 걱정이라고 지나가듯 건넨 한 마디 때문에 그녀는 한국인이 체크인할 때마다 내 방문을 두드렸다.


“반가운 사람이 있어서 소개해주려고 왔어. 내일까지 묵을 사람들인데 한국인이야!”

그 때마다 큰 눈으로 ‘어서 좋아해줘!’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새 얼굴을 소개하는 미쉘의 모습이 귀엽고 고마워서 두 팔을 쭉 뻗으며 실제보다 몇 배 더 들뜬 반응을 보였다. 그렇게 여러 번 미쉘을 안아주고, 낯선 한국인들과 어색하게 인사를 나눴었다. 그럼 미쉘은 “방해꾼은 이만 사라질게.”라며 또 한껏 신이 난 얼굴로 계단을 내려갔다.


미쉘에게 가깝고 맛있는 음식점을 물어봤을 때, 가장 먼저 이 햄버거 집을 이야기했다. 패스트푸드점이지만 두꺼운 패티를 한 입 깨물면 꽉 찬 육즙이 터지듯 죽 흘러나온다면서. 버섯과 치즈를 추가한 햄버거에 감자튀김, 맥주면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라고 말하며 입가에서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우리는 미쉘의 메뉴들을 주문했다. 나는 감자튀김 대신에 고구마튀김을 주문했다. 고구마튀김은 어딜 가든 성공하는 메뉴였다. 기름에 갓 튀겨져 나온 고구마튀김을 한 입 물면, 혓바닥이 델 정도로 뜨거운 기름이 오렌지 과육 알맹이가 터지듯 흘러 나왔다. 달콤한 고구마와 고소한 기름이 섞이도록 씹다보면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내일 아침 몸무게가 최소 500g은 늘어 있겠지만, 그렇다고 이 순간의 즐거움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우린 주문한 음식을 들고 테라스 자리로 향했다. 하얀 김이 올라오는 패티에 흘러 내리는 모짜렐라 치즈, 캐러멜라이즈된 양파와 구운 버섯이 가득 올라간 햄버거는 정말 별미였다. 배 부르고 공기도 선선한 샌디에고의 밤은 숨 쉬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로웬은 영어에 익숙하지 않은 나를 위해 정말 천천히 여러 이야기를 꺼냈고, 인내심을 갖고 내 이야기를 들어줬다.


“벌써 2잔을 비웠어.”
“나도. 오늘은 그래도 돼.”

오늘 밤은 취해도, 취하지 않아도 충분히 좋았다. 처음부터 다정하고 친절했던 이 남자와 함께 하는 시간은 특별했다. 컴퓨터 자판 치는 소리, 거래처와 통화하는 소리로 가득한 사무실 구석 자리에 박혀 별일 없는 하루하루를 보내다 아무 계획 없이 날아 온 이 곳이 나는 신세계 같았다. 몇 시간 전만 해도 낯선 외국인이었던 로웬은 이성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묘한 감정을 불러 일으키고 있었다.


나는 낯선 곳에서 만난 낯선 남자와의 낯선 시간에 놀라울 정도로 빨리 익숙해졌다. 처음 경험하는 모든 시간들은 잘 만들어진 퍼즐 조각처럼 내 몸 어딘가에 차곡차곡 쌓이고 있는 것 같았다.


테라스에 앉아 당근 빛이 나는 고구마튀김을 집어 먹으며 로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나는 가끔씩 샌디에고의 바람에 옷자락이 가볍게 떠올랐다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시간이 빠르게 흐르고 있었고, 어느 사이에 로웬은 내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서버가 뽀얀 거품이 찰랑거리는 맥주를 가져왔다.

“죄송합니다만, 마감은 언제죠?”

로웬이 물었다.

“음식은 30분 후까지만 받습니다. 홀에는 새벽 1시까지 있어도 됩니다.”


서버가 돌아간 후 다시 대화가 시작됐다. 로웬이 갑자기 내 손을 잡았다. 내일 어디갈지 고민하다 나도 모르게 엄지 손톱을 잘근잘근 씹고 있었던 것이다. 이 때부터 로웬은 손톱을 물어 뜯을 때마다 내 오른손을 잡아챘다.


“나도 엄마가 이렇게 해줘서 고쳤어.”

깜짝 놀라 굳어졌던 눈빛이 금세 풀어졌다.


“그렇다면 나도 금방 고칠 수 있겠는데.”

부풀어 오른 맥주거품이 가라앉기 전에 잔을 부딪히고 목을 축였다. 새벽 1시는 생각보다 가까웠다. 아쉬워하면서 우리는 테이블 위에 팁을 두둑히 놓고 나왔다. 오늘 밤 우리의 아지트가 되어준 것에 대한 보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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