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원래 불안이 많은 사람이다. 영화관에 가면 긴장이 되고 화장실을 가야 해서 늘 끝자리에 앉는다. 백화점처럼 높고 막힌 공간에 들어가면 건물이 무너질 것 같아 백화점을 가보지 않은지도 오래되었다. 비행기는 말할 것도 없이 인생을 뒤흔들만한 결정이 있지 않고서는 타지 못한다. 잠들기 전에 창문을 모두 잠그고 가스밸브까지 확인해야 잠이 든다. 물건이 떨어질 것 같은 전등이나 액자가 걸려있는 벽 아래에서는 잠들기가 쉽지 않다.
아빠의 갑작스러운 사고 이후, 나도 미래의 언젠가가 아니라 내일이라도 당장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언젠가 쓸 것 같아서, 버리기 아까워서 쌓아두고 보관해둔 물건들을 미련 없이 하나씩 정리하고 있다. 떠난 사람의 마음은 알 수 없고 남겨진 사람의 고통은 눈으로 보고 들을 수 있어서다. 단출한 아빠의 방을 정리하면서 살아가면서 필요한 건 정말 별로 없는 거구나 생각이 들었다. 내가 떠난 뒤에 가족이 내 물건들을 정리하며 어떤 마음이 들까 생각해 보다 그 무게를 좀 덜어놔야겠다 싶었다.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다. 가만히 있으면, 잠이 들면 온통 생각이 한곳으로 몰려서 그렇다. 부산을 떨고 몸을 움직여야 한다.
언젠가 아빠가 술에 취해서 전화로 내게 말했다. “아빠가 능력이 없어서 미안하다.” 나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술 좀 조금 마시라고 했고 동생과 나에게 유산 같은 거 남겨줄 생각하지 말고 다 쓰고 가라고 잔소리처럼 말하고 전화를 끊었는데 아빠는 하나도 쓰지 못하고 떠났다. 아빠는 자식에게 짐이 될까 은퇴할 나이가 한참 지나서도 누군가 불러주는 이가 있으면 어디든 달려가 일을 했다. 한 달에 나가는 돈이 얼마나 많은데 움직일 수 있을 때 조금이라도 일을 더 해야 한다고 나지막이 이야기하던 아빠의 모습이 떠오른다. 아빠의 남은 통장을 정리하며 아빠가 엄마도 모르게 모아둔 돈 이야기를 듣고 나도 울고 말았다. 엄마는 아빠가 맨날 일만 하고 돈을 안 가져 준다고 투정을 부렸는데 아빠는 엄마 몰래 노후자금을 모아두고 있었다. 노후자금으로 턱없이 부족한 돈이지만 아빠가 진짜 대단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동생의 말에 나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우리 아빠 진짜 능력 있는 사람이었네.’
집 밖을 나가지 않은지 일주일 가까이 되어 시간에 무감각해진다. 갑작스럽게 집 앞에 찾아온 친구가 건넨 꽃다발에 매서운 겨울바람 속에 봄이 오고 있구나 생각이 든다. 그 꽃을 바라보며 하늘에서는 절대 일하지 말고 꽃구경만 하고 살라던 엄마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온다. 아빠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받은 꽃이 아빠가 마지막으로 누운 곳이라 마음이 무너진다. 하늘에서 꽃이 핀다면 그 꽃은 어떤 모습일까. 봄이 되면 아빠가 꿈속에 찾아와서 하늘에서 꽃구경 잘하고 있다고 말해줬으면 좋겠다.
읽은 책을 정리하려고 시작한 글이 또 이렇게 끝난다. 이렇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으니 계속 적어야겠지. 우리가 이렇게 아빠를 그리워하고 있다고 아빠에게 보내는 글, 아빠가 떠나고 나서야 아빠를 사랑하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