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차 꽃 필 무렵

여행에 대하여

by 햇살나무 여운


녹차 꽃을 보신 적이 있나요? 차나무에서 이렇게 맑고 청초하고 단아하게 어여쁜 꽃이 핀답니다. 흰 동백을 닮기도 하였지요? 아, 동백꽃도 붉은 꽃뿐만 아니라 흰 꽃이 핀답니다.




우리가 커피 다음으로 자주 마시는 녹차는 종류가 다양하다. 그중 ‘우전(雨煎)’을 최고로 치는데, 이는 24 절기 중에서 이른 봄에 해당하는 곡우(穀雨) 전후에 딴 가장 순하고 어린잎으로 차를 만들기 때문이다. 가공되어 나온 녹차를 마시는 일은 익숙하지만, 차꽃을 볼 일은 차밭을 찾아가지 않는 한 사실 매우 드문 일이다. 나 역시도 다도를 접하면서 차나무에 꽃이 핀 것을 예전에 몇 번 본 적은 있었는데 정확히 언제 피는 줄은 미처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 여행길에서 기대치 않았던 녹차 꽃을 우연히 만났다. 이렇게 반가울 수가!



KakaoTalk_20231011_193641673_02.jpg
KakaoTalk_20231011_193641673_01.jpg



10월 10일은 우리 부부의 결혼기념일이다. 결혼식을 올린 해가 2010년이었으니 어느덧 13년이 흘렀다. 잊어버리려야 잊어버릴 수 없는 ‘트리플 텐’이다. 그동안 서로가 늘 바쁘게 매여서 살다 보니 결혼기념일이라고 해서 특별히 날짜를 맞춰 여행을 가거나 기념일을 잘 챙기지 못했었다. 사실 평소에도 남편과 나는 무슨 날을 굳이 챙기지는 않는 편이다. 내가 좀 더 무심한 쪽이다. 이미 날마다 충분히 감사하게 받고 있어서 특별한 날 뭘 더 특별하게 챙겨 받을 필요성을 잘 못 느꼈다고 해야 할까? 남들은 기념일을 맞아 목걸이나 반지도 선물 받고 한다는데, 13년 묵은 결혼반지도 ‘돌’처럼 여기고 있으니 그거라도 꺼내서 반짝반짝 닦아서 다시 끼면 되겠지. 요즘 금값도 많이 올랐다는데 위급하면 팔던가? 무심한 건지 무던한 건지! - 그래도 남편님? 이 글을 읽거든 뭐 반짝거리는 목걸이라도? 나도 여자랍니다. -





이번 기념일에는 한글날 연휴가 끝나자마자 마음을 먹고 일부러 여행을 다녀왔다. 남편은 자영업자가 되고, 나는 무소속의 자유부인이 되니 무작정 그냥 떠날 수 있고 이것 참 좋구나. 1박 2일로 숙소도 잡았다. 때마침 독서 모임에서 <아는 만큼 보인다> 문화유산답사기를 읽고 있어서 여행지는 담양과 전주로 잡았다. 예전부터 담양 소쇄원을 꼭 가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실천하는 독서다.


아침 일찍 출발해 정오가 되기 전 도착한 소쇄원 원림(園林)은 더 말할 나위 없이 좋았다. 한참 앉아있고 싶었지만, 평일인데도 사람이 제법 있었다. 그리고 있는 그대로 쉬면서 즐기기보다 자꾸만 사진 찍기 바쁜 내 모습도 보였다. 요즘은 일상을 이벤트처럼 전시하듯 보여주고 공유하는 것이 익숙해지다 보니 지금 이 순간에 온전히 집중하기보다 ‘누군가에게 보여줘야지’하는 마음이 앞서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관광이 아니라 여행인데 말이다. 나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정자에 잠시 걸터앉아 보았다. 다음 목적지까지 급할 것도 없고, 음미하다 보면 순간은 영원처럼 느껴지기도 하니까.


젊었을 때는 어디든 많이 다니고 하나라도 더 많이 보는 것에 급급했다면 지금은 그냥 적게, 좁게 보고 대신에 깊게 보는 것이 더 좋아졌다. 나이 듦에 따라 여행도 바뀐다. 그리고 여행은 ‘어디를’ 가느냐보다 ‘누구와’ 가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걸 이제는 경험을 통해 안다. 삶이라는 여행도 마찬가지가 아니던가.



KakaoTalk_20231011_194019907.jpg
KakaoTalk_20231011_194019907_01.jpg
KakaoTalk_20231011_194019907_02.jpg





담양 죽녹원에 들러 소박한 한정식으로 점심을 먹은 후 대나무숲을 거닐었다. 지도를 들고 여기로 갔다가 저기로 갔다가 길이 아닌 곳으로도 갔다가 바로 거기서 녹차 꽃을 만난 것이다. 대나무보다 녹차 꽃이 더 반갑고 좋았다. 걷다 보니 어쩌다 길을 잃어 다른 출구로 나왔지만 그 또한 유쾌했다. 마지막으로 댓잎 아이스크림을 디저트로 먹고 숙소가 있는 전주로 넘어왔다. 숙소는 전주 한옥마을로 잡았다.



KakaoTalk_20231011_194211872_01.jpg
KakaoTalk_20231011_194211872.jpg
KakaoTalk_20231011_194211872_02.jpg




9년 전쯤에 친구와 왔었던 한옥마을은 많이 변해있는 느낌이었다. 곳곳에 안마 족욕 카페가 어찌나 많던지 이 또한 한때의 쏠림 현상인가? 화려하고 시끌벅적한 거리가 우리 부부에게는 그다지 매력적이지는 않았다. 우리는 한옥마을 거리를 가볍게 한 바퀴 돌고 일찍 숙소로 들어와 충분히 쉬기로 했다. 작은 한옥이었던 숙소는 마당 가운데 정원이 있어서 서로 사생활을 침해받지 않고 조용히 쉬기에 괜찮았다. 연휴가 끝난 평일이어서 더욱 조용했다. 아무래도 민감하고 내향적인 나로서는 무엇보다 숙소는 조금 신중하게 고르게 된다. 합리적인 가격에 비교적 쾌적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씻고 조식으로 제공된 토스트와 과일을 먹고 문을 활짝 열어두고 커피를 마시며 마당 정원을 한참 바라보았다.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기도 하고 굳이 뭘 하지 않아도 그저 그냥 좋았다. 수시로 괜찮은지 불편하거나 불안한 건 없는지 살피며 무슨 말을 더 보태지 않아도 먼저 알아주는 내 ‘마음의 집’ 같은 옆지기가 곁에 있으니 여행은 참 편안하고 평화로웠다.



KakaoTalk_20231011_194549077.jpg
KakaoTalk_20231011_194603202.jpg
KakaoTalk_20231011_194549077_01.jpg



체크아웃을 하고 나와서 전주수목원으로 향했다. 전동성당을 가려고 했으나 미사 중이라 너무 많이 기다려야 해서 차선책으로 선택했는데, 막상 가보니 오히려 잘했다 싶었다. 이제 여행을 가면 점점 더 이런 곳만 찾아다니게 될 것 같다. 숲 속을 걷다가 벤치에 앉아서 쉬다가, 소풍 나온 아이들도 보다가 또 앉아서 쉬다가, 장미의 뜰에 들러 한참을 꽃향기에 취하다가 돌아왔다. 가을 하늘빛도 가을 늦은 꽃도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KakaoTalk_20231011_194746884_03.jpg
KakaoTalk_20231011_194746884.jpg
KakaoTalk_20231011_194746884_02.jpg
KakaoTalk_20231011_194746884_01.jpg
KakaoTalk_20231011_194746884_04.jpg



여행을 마치고 올라오는 길에 멀지 않은 곳에 있어서 <아는 만큼 보인다>에서 언급한 부여왕릉원(능산리고분군)도 잠시 들렀다 왔다. 이곳도 유네스코에 등재된 세계문화유산이다. 백제의 왕릉은 신라나 조선의 왕릉보다 소박하고 단정하고 단아해서 좀 더 친근한 느낌이었다.


여백을 많이 둔 이번 여행도 소박하고 단정하고 담백해서 오히려 좋았다. 우리는 그동안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결혼했다고 늘 이야기했었다. 실제로 축가도 그 노래를 불러주었었지. 그런데 이번 여행을 다녀오면서 바뀐 것 같다. 앞으로는 다르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녹차 꽃 필 무렵에' 결혼했다고.


가을도 모으고, 걸음도 모으고, 기억도 모으며.

10월의 어느 멋진 날! 꽃 같은 여행이었다.




KakaoTalk_20231011_195000421.jpg
KakaoTalk_20231011_195000421_01.jpg
KakaoTalk_20231011_195000421_03.jpg
KakaoTalk_20231011_195000421_02.jpg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