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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살나무 여운 Apr 22. 2024

손글씨 수행자의 루틴

문장 수집가의 잡지 인터뷰

다산 정약용의 삼근계(三勤戒)! 고쳐지지 않는 저의 세 가지 병통! 그래서 리추얼이 필요합니다.


저는 종이책 수호자이자 문장 수집가입니다. 더불어 손글씨 수행자이기도 하지요. 어느덧 10년 가까이 손글씨 필사를 꾸준히 이어오다 보니 어느 날에는 잡지사로부터 인터뷰 제의를 받은 적도 있답니다. 저처럼 지극히 평범한 민간인이라도 무언가 한 가지를 꾸준히 오랜 시간 집중해서 쌓아나가다 보면 그것이 곧 새로운 길이 되기도 하고, 글쓰기가 그렇듯이 그 꾸준함의 누적이 곧 자신을 지켜주는 힘이 되는 것 같습니다. 갈고닦을수록 그 힘은 강해지는 법이고요.


필사는 제게 마음 챙김과 기도의 도구입니다. 종교는 없지만 손글씨로 올리는 일종의 기도문이라고 할까요? 손글씨를 쓸 때가 가장 경건해지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문장을 베껴 쓰는 단순한 되새김질이 아니라 가장 차분하게 내면에 집중하는 행위로써 자신을 다시 쓰는, 마음을 맑게 씻는 의식입니다.   


마흔을 넘어가면서 누구나 한 번쯤 인생의 전환기를 맞이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마흔을 주제로 하는 책이나 강연, 프로그램이나 큐레이션도 많이 눈에 띕니다. 이 시기에 미라클 모닝이라든지 독서모임이나 글쓰기 모임도 많이들 시작하게 되기도 하고요. 저 역시 마흔 중반을 향해가면서 자신에게 잘 맞는 루틴이나 리추얼을 갖는 습관은 일상을 무너뜨리지 않고 유지하는 데에 참 도움이 많이 된다는 걸 실감합니다. 저는 전환기를 통해서 비로소 밥벌이에서 꿈벌이로 들어섰습니다. 직업은 물론이고 정체성이 바뀌었고, 무엇보다 가장 자신다운 꿈의 길과 혼업(魂業)을 되찾았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글을 쓰고 있습니다.


특히 삶 속에서 길을 잃었을 때 저는 책 속에서 좋은 어른과 스승을 만났습니다. 꼭 마흔이 아니더라도 삶의 전환기에 스승으로서 추천하고 싶은 단 한 사람을 고르라고 한다면 저는 개인적으로 구본형 선생님을 꼽고 싶습니다. <익숙한 것과의 결별>로 이미 유명하시지만, 자신의 길을 찾고 있는 젊은 친구들에게는 <구본형의 마지막 편지>를 읽어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전환기에 가장 어울리는 책으로는 <위대한 멈춤>을 추천합니다. 구본형 선생님의 제자였던 박승오 님과 홍승완 님이 함께 쓰신 책인데 제목이 알려주듯이 전환기에 필요한 다양한 길을 모색하는 데에 유용합니다.


손글씨 수행자의 흔적? 누적!
전환기의 도구, 필사! 그리고 전환기를 위한 추천도서
 「배우는 사람에게 큰 병통이 세 가지 있다. 네게는 그것이 없구나. 첫째 외우는 데 민첩한 사람은 소홀한 것이 문제다. 둘째, 글 짓는 것이 날래면 글이 들떠 날리는 게 병통이지. 셋째, 깨달음이 재빠르면 거친 것이 폐단이다. 대저 둔한데도 계속 천착하는 사람은 구멍이 넓게 되고, 막혔다가 뚫리면 그 흐름이 성대해진단다. 답답한데도 꾸준히 연마하는 사람은 그 빛이 반짝반짝하게 된다. 천착은 어떻게 해야 할까? 부지런히(勤) 해야 한다. 뚫는 것은 어찌하나? 부지런히(勤) 해야 한다. 연마하는 것은 어떻게 할까? 부지런히(勤) 해야 한다. 네가 어떤 자세로 부지런히 해야 할까? 마음을 확고하게 다잡아야 한다.」  

- 정약용의 삼근계 / 《위대한 멈춤》 중에서




<여성 동아> 잡지 인터뷰 원고를 통해 저의 일상의 루틴을 조금 공유해 볼까 합니다.     

      

1. 아침에 일어나서 하는 루틴을 간단하게 묘사해 주세요.          


아침에 굳이 알람을 설정하지는 않고 자연스럽게 눈이 떠지는 대로 일어납니다. 시간은 아침 7시 정도로 비교적 규칙적인 편입니다. 눈이 떠지는 대로 기지개를 켜고 가글을 합니다. 따뜻한 물을 한 잔 마시고 라디오를 켭니다. 채널은 93.1 KBS 클래식 FM에 거의 고정되어 있는 편인데, 가끔은 <카카오같이가치> 힐링사운드에서 파도소리나 빗소리를 골라서 ASMR을 틀어 놓고 마음 가는 대로 5분에서 10분 정도 명상을 하기도 합니다. 환기도 시키고 그날 기분에 따라 향이나 초를 켜거나 아로마 오일을 한두 방울 쓰기도 합니다. 그리고 창가 책상에 앉아서 최근에 읽었던 책들 중에서 그날그날 와닿는 시나 문장, 나누고픈 내용을 요약 발췌하여 필사를 시작합니다.      


https://together.kakao.com/mind/41



2. 아침 필사를 하신 지는 얼마나 됐나요? 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어릴 적부터 책 읽기나 글쓰기를 좋아했었는데, 20대부터 문장이나 글귀를 찾아 스크랩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내 마음을 읽어주는’ 공감 문장을 모으는 것에서 시작해서 좀 더 정확히는 '내가 하고픈 말을 대신 표현해 주는' 글귀를 다시 한번 정리하고 되새김질하는 습관으로 발전하고 정착해 왔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직장일로 바쁘게 지내던 때에는 주로 출퇴근하는 시간을 이용해 직접 찍은 사진에 타이핑한 글귀를 넣어 작업하는 것을 즐겼습니다. 저는 다른 사람의 사진은 잘 쓰지 않고 글귀에 어울리는 맞춤 도화지를 직접 찍는 것을 좋아합니다. 사진이 취미인 친구에게서 꽃도화지를 협찬받기도 하고요. 그리고 책을 읽으면서 나누고픈 유익한 내용이 있으면 읽기 좋게 발췌요약 타이핑해서 친구들과 지인들에게 공유하기를 좋아했습니다. 루틴으로서 삼아서 본격적으로 손글씨 필사를 꾸준히 하게 된 것은 7년 남짓 되었습니다.    


   


3. 주로 어떤 책을 필사하나요? 그 책을 선정하는 기준이나 이유는 무엇인가요?     


 시를 좋아하기도 했고, 바쁜 직장인에게 짧게 조금씩 꾸준히 필사하기에도 적당해서 처음에는 좋아하는 시인의 시를 주로 했었습니다. 호흡명상을 10년 넘게 해서 마음, 수행, 치유, 공감이라는 키워드에 의미를 두고 있습니다. 초기에는 자기 계발서나 인문학 관련 서적 위주로 했었고, 최근에는 문장표현 연습을 위해 편식하지 않고 좀 더 다양하게 시도하려고 에세이와 소설도 즐겨하고 있습니다. 가끔씩 좋아하는 영화나 드라마의 명대사, 노래 가사를 필사하기도 합니다. 물론 자신이 좋아하는 책이나 글귀를 직접 고르는 것이 꾸준히 오래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4. 아침 필사를 하기 전과 후 달라진 점이 있나요? 마음가짐 태도, 행동 무엇이든 다 좋습니다.     


저에게는 필사가 명상과 마음 챙김의 도구라고 생각합니다. 들뜨고 내달려가려는 마음을 차분히 달래고 가라앉혀서 생각을 집중하고 정리하는데 더없이 좋은 방법입니다. 조금만 딴생각을 해도 글씨를 틀리거나 삐뚤어집니다. 마음이 흐트러지면 글씨로 바로 드러납니다.    


저는 글씨를 특별히 잘 쓰거나 예쁘게 꾸미거나 하는 것은 잘 못합니다. 다만 내용은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누군가 저처럼 그 문장, 그 글귀가 필요한 사람에게 또한 도움이 되는 내용이면 좋겠다는 뜻에서 인스타그램에 공유하게 되었습니다. 즉 필사의 목적이 예쁘게 쓰기보다는 배움과 나눔에 있습니다.


필사를 통해서 다시금 자기만의 언어를 재창조하는 연습이 되기도 하고 글쓰기에도 정말 도움이 많이 됩니다. 손글씨를 쓰면서 그 표현을 꼭꼭 씹어서 먹는다고 해야 할까요?

  

제가 하는 방식은 정확히는 중요한 부분을 발췌 편집해서 쓰는 '초서(抄書)'에 해당합니다. 다산 정약용이 공부의 기본으로 강조했던 방법이기도 합니다. 몇 페이지 이상의 내용을 한 페이지 안에 들어오도록 발췌 요약해서 쓰고, 필사한 부분만 읽어도 자연스럽게 내용이 연결되어 말이 되도록 해서 누가 읽어도 이해되게 쓰는 능력이 연마되는 것 같습니다.     




5. 매일 아침 루틴을 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닌데, 하기 싫은 날도 있나요? 하기 싫을 때 스스로를 어떻게 독려하나요?     


필사즉생(筆寫卽生)! 제가 만든 말인데, 필사를 하면서 글도 살아나고 저도 살아난다는 의미를 담았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매일 뭔가를 단 몇 줄이라도 조금씩 읽고 씁니다. 그리고 워낙 오랜 습관이 되어 특별히 하기 싫은 날은 없는 것 같습니다. 미라클 모닝처럼 꼭 시간에 제약을 두지는 않고, 몹시 바쁘거나 피곤한 날에는 스트레스를 받으면서까지 하지는 않습니다. 어디까지나 긍정성을 위한 밝은 습관으로서 즐겁게 자유롭게 합니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계속하고 싶고 제게는 필사가 쉼입니다. 매일 아침 필사를 해놓고 하루를 시작하면 하루의 방향성을 바르게 세우고 시작할 수 있어서 뿌듯하고 좋습니다. 뭐라도 한 느낌? 부지런해진 기분?    



6. 필사를 하기에 앞서 준비하는 태도 또는 준비물 같은 게 있나요?     


저는 필사를 할 때 주로 만년필을 씁니다. 노트의 질감이나 잉크의 종류에 따라서 글씨가 번지거나 매끄럽게 나아가지 않는 날도 있습니다. 틀리면 지울 수도 고칠 수도 없지요. 인내심과 집중력을 연마하는 데에 탁월합니다. 저절로 숨을 멈추고 호흡을 고르게 됩니다. 그리고 곁에 책을 여러 권 쌓아두고서 그날 아침에 마음 가는 대로 ‘오늘은 이 내용이 나에게 좀 더 필요하구나’ 하고 제법 신중하게 고릅니다.

     

어떠한 루틴이든 자신에게 잘 맞는 방법을 찾고, 여러 가지를 시도하는 것보다는 단순한 한 가지에 집중하는 것이 꾸준히 이어나가는 비결이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이든 자신만의 루틴과 리추얼이 있는 사람은 이미 자신을 충분히 아끼고 사랑하며, 그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스스로 자신을 잘 관리해나가고 있는 건강하고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감사합니다.



<여성 동아> 잡지 수록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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