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이 파도처럼 덮쳐오는 날 시를 복용한다

<단단한 고요>가 필요하다

by 햇살나무 여운


구름이 몰려오는 것이 뻔히 보인다

비가 내리는 것을 빤히 바라본다

나에게만 몰려오는 구름

나에게만 내리는 비

그저 바라볼 뿐 속수무책이다

딱히 이유는 없다

날씨 탓을 해본다

그냥 그런 날이 있다

그냥 그런 나를 본다

가만히 본다

기다린다

묵묵히

내 할 일을 하며

이제는 안다

곧 지나간다는 걸

애써 서두른다고

떨쳐지지 않는다는 걸

무엇을 하든

무엇을 하지 않든

그런 날이 있다

우울이 파도처럼 덮쳐오는 날

시를 복용한다




오늘의 시 처방전은

김선우 님의 <단단한 고요>입니다.

단단한 고요

- 김선우

​ 마른 잎사귀에 도토리알 얼굴 부비는 소리 후두둑 뛰어내려 저마다 멍드는 소리 멍석 위에 나란히 잠든 반들거리는 몸 위로 살짝살짝 늦가을 햇볕 발 디디는 소리 먼 길 날아온 늙은 잠자리 체머리 떠는 소리 맷돌 속에서 껍질 타지며 가슴 동당거리는 소리 사그락사그락 고운 뼛가루 저희끼리 소근대며 어루만져 주는 소리 보드랍고 찰진 것들 물속에 가라앉으며 안녕 안녕 가벼운 것들에게 이별인사 하는 소리 아궁이 불 위에서 가슴이 확 열리며 저희끼리 다시 엉기는 소리 식어 가며 단단해지며 서로 핥아주는 소리

도마 위에 다갈빛 도토리묵 한 모

모든 소리들이 흘러 들어간 뒤에 비로소 생겨난 저 고요 저토록 시끄러운, 저토록 단단한,


모든 소리를 다 담아내면

궁극은 고요인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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