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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살나무 여운 Sep 06. 2024

세한록(洗恨錄)

홍익인간의 이념으로

사수가 사다리에서 제대로 미끄러져 떨어졌었나 보다. 며칠째 컨디션을 회복하지 못하고 끙끙 앓고 있다. 나에게는 그냥 살짝 삐끗했다고만 하고, 그 말을 또 곧이곧대로 믿어 넘기는 조수는 마찬가지로 뭐라 말도 못 하고 속이 상하고 상하다 못해 구덩이가 더 깊어진다. 어릴 적에 엄마가 늘 속상하다고 말할 때마다 그게 정말 어떤 마음일까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었는데, 지금은 말로 굳이 설명할 수는 없어도 그때 그 마음을 너무 잘 알 것만 같다. 나흘째 왔다 갔다 길어지는 작업에 드디어 마지막 간단한 마무리만 남았다고 해서 따라가지 않고 혼자 보낸 걸 조수는 내심 후회 중이다. 혼자 보내면 꼭 뭔가를 잃어버리고 놓고 오거나 어딘가를 긁히거나 삐끗해서 오니 도대체가 한눈을 팔 수가 없다. 사수도 평범한 한 인간일 뿐이라는 사실을 때때로 잊는다.


좀처럼 아픈 내색이라고는 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 저 정도면 정말 많이 아픈 건데 큰일이다. 의료대란으로 받아주는 병원이 없어 구급차들이 뺑뺑이를 돌다가 결국 목숨을 잃기도 한다는 뉴스가 끊이지 않는 요즘, 특히나 더 아프면 안 되고 다치면 안 되는데. 그 와중에도 꾸역꾸역 맡은 일을 다 소화해 내고 의뢰인과의 약속을 지켜낸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좀비가 되어 돌아온 사수를 눕혀놓고 고작 팔다리를 주물러주는 것뿐이다. 아로마오일을 바르고 아픈 곳을 짚어서 열심히 풀어준다. 때마침 추석 명절을 앞두고 홈쇼핑에서 온통 안마의자를 보여준다. 자그마치 60개월 할부란다. 아주 잠깐 탐이 나다가 얼른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려본다.


"지금 이 마사지가 500만 원짜리야. 알아둬요. 참고로 나는 그냥 현금이 좋아, 알죠?"




아침 일과를 시작할 무렵 전화벨이 울린다. 다름 아닌 오동나무 할머니이시다. 사수는 이제 익숙하다는 듯 편안하게 전화를 받는다. 이건 그저 안부 전화라고 봐야 한다. 서랍장을 고쳐드리러 갔다가 할머니께서 아끼시는 오동나무 장롱에 바를 왁스를 좀 구해달라는 부탁을 들어드린 후로 가끔 계속 전화를 하신다. 집 여기저기 돌봐달라고 두어 번 더 부르시기도 하고, 이사 가시면서 기존에 살던 아파트가 팔리면 새 주인에게 소개도 해주시겠다고 하셨다. 드디어 그 집이 팔렸는데, 집을 산 사람이 안 고치고 당분간은 그냥 청소만 하고 살겠다고 했다며 소개를 못해줘서 아쉬워서 어떡하느냐고 말씀하신다. 팔린 직후 집값이 2천만 원이나 더 올랐노라고, 그 또한 인연이고 그 사람 복이 아니겠느냐고도 하신다. 노욕을 부리지 않고 순리에 순응하는 품 너른 어르신의 마음씀이 고우시다. 최근에 이사를 하며 정리하느라 힘들어서 몸무게가 많이 빠졌다고도 하셔서 걱정도 되었다. 사수는 건강 잘 돌보시라고 안부를 챙긴다. 옆에서 들으며 나 역시 마음이 쓰이고 사수에게 그런 분이 생긴 사실이 한편으로는 흐뭇하기도 하다. 오동나무 할머니께서 아주 가끔이더라도 오래도록 계속 전화를 걸어오셨으면 좋겠다. 우리 모두에겐 그냥 무작정 전화를 걸어 그런 시시콜콜함을 주고받을 수 있는 작은 틈이, 마음 한 귀퉁이에 쌓인 외로운 한을 풀어주고 씻어주는 대나무밭이 필요하니까.   


이번엔 단골 부동산 사장님의 전화다.


"유리테이프를 뜯고 보니 너무 끈적거리는데, 이런 건 어떻게 없애나요? 이런 걸 물어봐도 되나요?"


"붙박이장에 뾰족뾰족 뭔가가 튀어나왔는데, 이건 뭘까요?"


그 밖에도 많다. 뭔가를 통째로 바꾼다고 하면 아직 쓸만한데 왜 바꾸느냐, 부품만 갈아도 된다. 아주 살짝만 손보면 이사 갈 때까지 그냥 쓰셔도 된다. 자동센서 변기에 물이 안 멈춘다고 하면 화상통화를 해가면서 수도를 잠그는 법을 알려주고, 디지털조명 모듈이 나가서 사무실 전등을 며칠째 켜놓은 채 퇴근하고 있다고 하면 어디에 어떻게 스위치를 내려 불을 끄는지도 상세하고 친절하게 알려준다. 사수는 자신이 출동하면 비용이 드니 충분히 할 수 있는 부분은 한번 직접 해보셔도 된다고 무료로 가르쳐 준다. 전화 상담만으로 의뢰인들의 한도 풀어주고 돈도 벌어준다. 몇십만 원이 들 일을 몇만 원에 해결해 주기도 한다.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하기로 마음먹은 홍익인간의 화신이야 뭐야? 열대야가 지속되는 무더운 8월 한밤에 달려가 과로로 단명한 일괄전원스위치를 교체해 주고 에어컨을 살려주니 지인이 말한다. 어나더 레벨이라고.


여기저기 아무리 물어봐도 도저히 고쳐주겠다고 하는 사람이 없어서 정말 마지막으로 연락했다고 곧 울기라도 할 것처럼 절박하게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이 있으면 거리가 먼 타 지역까지 가끔 찾아가기도 한다. 여기저기 흔하디 흔한 집수리이지만, 기꺼이 해주겠다는 마땅한 그 한 곳을 구하지 못해서 오래 애를 먹는 사람들도 있다.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정말 고마워하는 그 누군가에게는 동아줄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고 모두가 다 그렇지만은 않다. 요즘은 연락처도 주지 않고 플랫폼 어플로만 대화를 주고받으며 먹튀를 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간단하게 될 것처럼 얘기해서 막상 가보면 사수도 어쩔 수 없이 손대지 못하는 일도 있는데, 그러면 아무런 말도 없이 그걸로 끝인 경우도 있다. 그렇게 다녀간 사람이 우리만은 아닐 것이다. 노쇼 못지않다.     


엊그제는 젊은 청년이 세탁기를 놓을 자리에 타일작업을 요청해 왔다. 기존에 있던 오래된 김치냉장고와 붙박이장을 철거하고 단을 넓혀달라는 부탁이었다. 사수는 그 잠깐의 대화에서도 청년이 물류센터에서 야간작업을 하며 번 돈으로 영끌해서 이번에 아파트를 샀다는 히스토리를 듣는다. 들어주는 사람이 있으면 누구나 자신의 이야기가 하고 싶은가 보다. 집집마다 만나는 동물 친구들이 사수에게 곧바로 곁을 내주는 까닭도 어찌 보면 이해가 된다. 처음 만나는 사람이나 동물이나 사수의 곁은 안전하다고 느끼는 것일까?  


괜찮다고 해도 모자란 3천 원을 굳이 끝까지 동전까지 털어 챙겨준 청년, 고마워요.



옆에 와서 다소곳이 앉은 얘는 도도에요! 도도해서 도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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