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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살나무 여운 Sep 14. 2024

맥주 한 병

<명자꽃은 폭력에 지지 않는다>


엄마,

그날 밤 기억해?


술이라면 질색인 엄마와 딸이

길갓집 단칸방에 마주 앉아

맥주 한 병을 나눠 마셨던 날 말이야.


그 맥주 한 병에

엄마의 말 한 마디에

난 대학을 접었지.

보란 듯이 합격해 놓고서도

꿈을 버릴 수밖에 없었지.


나는 홀로 깊은 밤 옥상에 올라

소리 없이 눈물을 삼켰지.

나마저 엄마와 맞서 싸워

이길 수는 없었으니까.


그런데 이제야 알겠어.

정작 술이 필요했던 사람은

내가 아니라 엄마였었다는 걸

그날 밤 엄마는 맥주가 아니라

피눈물을 들이켰었다는 걸.


세상 어느 부모가 자식에게

공부를 포기하면 안 되겠느냐는 말을

맨 정신에 입밖으로 꺼낼 수 있을까


오죽하면 그랬을까

그만큼 그토록 힘들었었다는 걸

이제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내가 엄마의 나이가 되어서야 겨우


엄마, 내가 너무 늦었지.

이제는 괜찮아, 정말 괜찮아.


그리고 난 꿈을 접은 게 아니었어,

버린 것도 아니었어.

아주 잠시 미뤘던 것뿐이야.

조금 멀리 돌아서 왔을 뿐이야.

덕분에 스스로 길을 내는 법을 익혔지.


엄마, 난 이제 정말 괜찮으니까

그때 일 더는 마음에 담아두지 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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