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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살나무 여운 Oct 22. 2024

마지막 편지

<명자꽃은 폭력에 지지 않는다>


엄마, 벌써 열 번째 편지네요.

이것이 하늘에 띄우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 같습니다.


오랜만에 꿈을 꾸었어요.


그러나 역시 엄마 꿈은 아니네요.

엄마가 내 꿈에는 좀처럼 찾아오진 않지만,

그만큼 내가 잘 살고 있음을 

엄마가 알고 있고 믿고 있다는 의미라는 걸

그래서 딱히 서운하진 않아요


어릴 적에도 엄마는 그랬어요

언니나 오빠는 아침에 늘 깨우느라 전쟁이고

매번 뭘 까먹고 빼먹어서 챙겨야 하는데,

나는 깨우지 않아도 알아서 일어나고

뭘 잊어버리는 법이 없어서

한 번 문밖을 나서면 돌아오는 일이 없다고

손이 갈 일이 없다고

 

그래서 그런가 마지막 날에도 엄마는

언니만 온통 걱정하고

내 걱정은 없으셨어

엄마는 나를 너무 믿으셨어요


어릴 적 엄마가 집을 떠난 후

혼자 남겨지면 어떡하나 무서워서

꿈에서 늘 엄마를 찾아 쫓아갔었는데

겨우 닿을 듯 손을 뻗으면

나를 향해 돌아서는 엄마의 얼굴을

알아볼 수가 없어서

마음이 그만 철렁해서는 

잠에선 깨곤 했었죠.


어릴 적 오랜 친구들과 멀어져

중학교 마지막 한 학기를 남겨두고

엄마를 따라 뒤늦게 전학을 왔을 때는

엄마는 몰랐겠지만

아이들에게 놀림도 당하고

새로운 학교에 그다지 잘 적응하진 못했었죠


어릴 적의 그 불안과 상처들은

성인이 되어서도 꿈에서 자주 되살아나

쫓기거나 괴롭힘에 시달리다

베개가 흥건히 젖도록 울면서

잠에서 깨기도 했었네요

 또한 그 꿈과 다를 바가 없었죠


엄마를 하늘로 떠나보낸 후에는

도저히 무서워서 잠을 잘 수가 없었지요

대낮에도 불을 훤히 켜두고

방문을 열어두어야만

겨우 숨이 쉬어졌어요

길을 가다가도 버스를 타고 가다가도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지고 숨이 막혀서

자주 길바닥에 주저앉고는 했었지요


그런데 이번 꿈에서는 달랐어요

현실에서나 꿈에서나 여전히 다름없이

사람들의 본색과 마주하지만

더 이상 쫓기지 않고 당하지 않고

비록 약하고 떨리는 목소리이지만

굳건히 나의 의지를 외치는 꿈이었어요


나는 살겠다고

내 길을 완주하겠다고

그러니 나를 좀 내버려 두라고

꿈인데도 얼마나 안간힘을 썼던

한새벽에 깨고 나니 몹시 시달린 것처럼 

기진맥진하기까지 하네요


그런데 분명 힘이 생겼어요

물론 여전히 나는 약하지만

그 미묘한 변화는 나만이

느낄 수 있는 것이겠지요

 

이제는 더 이상 서러운 꿈은 없어요

꿈에서라도 외롭지 않아요

여전히 혼자는 조금 불안하고

방문은 계속 열어두어야 하지만

많이 좋아졌어요 정말 괜찮아요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내 사람이 있고

내 불안을 안아주는 사람들이 있고

내 꿈을 지켜주는 사람들이 있으니


이미 믿어 의심치 않겠지만

나는 잘 살게요, 엄마

엄마도 그곳에서

다 살지 못한 엄마의 꿈을

실컷 살고 있을 거라 믿어요.


이젠 보내 드립니다, 안녕히.

사랑해요, 나의 엄마



- 당신의 영원한 막내딸 

  여운 올림



김진호 '엄마의 프로필 사진은 왜 꽃밭일까'

엄마의 사진엔 꽃밭이 있어
꽃밭 한가운데 엄마가 있어
그녀의 주변엔 꽃밭이 있어
아름답게 자란 꽃밭이 있어

-  김진호 '엄마의 프로필 사진은 왜 꽃밭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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