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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촌철활인

대출한 책을 훼손했습니다

송경동 <꿈꾸는 소리 하고 자빠졌네>

by 햇살나무 여운


다소곳한 문장 하나 되어
천천히 걸어나오는 저물녘 도서관

함부로 말하지 않는 게 말하는 거구나
서가에 꽂힌 책들처럼 얌전히 닫힌 입

애써 밑줄도 쳐보지만
대출 받은 책처럼 정해진 기한까지
성실히 읽고 깨끗이 반납한 뒤
조용히 돌아서는 일이 삶과 다름없음을

나만 외로웠던 건 아니었다는 위안
혼자 걸어 들어갔었는데
나올 땐 왠지 혼자인 것 같지 않은
도서관




- 송경동 '삶이라는 도서관'





대출한 책을 훼손했습니다

군데군데 구겨지고 찢기기도 했고

커피도 좀 쏟았습니다

밑줄도 긋고 낙서도 좀 했습니다

종이날에 손가락을 베이기도 했습니다


이를 어째,

입술 자국도 있네요.


빌려온 줄 까맣게 잊고 마치 내 책인 양

그래도 건너뛰지는 않았습니다

허투루 읽지는 않았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은 했습니다

다 이해하지도 못하고 어렵기도 했지만,

재미는 있었습니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니

한 권의 시집이 되어 있네요.

세상에 하나뿐인 시집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혼자 읽지 않고

당신과 함께 읽어 즐거웠습니다.

훼손된 중고책이지만,

사랑으로 읽혔기를

용서해 주시기를.








기름 묻은 스패너가 투덜거린다
나는 왜 시의 소재가 될 수 없냐고
덩달아 밀링도 투덜거린다
내가 뚫은 수많은 요점들이
근래 한국문학에 제대로 인용된 적 있냐고
컨베이어도 투덜거린다
뺑이치며 이 세상 돌려줘봐도
우리에 대한 서사는 한줄도 없다고
잠자코 듣고 있던 미싱도
공작기계도 건설공구도 농기계도
어구도 한 마디씩 하고 나선다
시끄러워 죽겠다
모두가 자기들 얘길 쓰는 거라고
니들 얘기는 니들이 쓰면 되지 웬 투정들이냐고
한마디 하고 만다


- 송경동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는가'







난 곡류와 단백질만을 섭취하며 자라오지 않았다.
대다수 인류가 실현하는 끊임없는 사랑과 노동과 헌신,
그 선한 힘을 나눠 받으며 이만큼이나마 자라왔다.
이 길이 맞는 길인지 가끔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함부로 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건 그 때문이다.
그 모든 생명과 물질들에게 감사드린다.

얼마 전 지구에서 가장 먼 별이 발견되었는데
129억 광년 떨어진 곳에 있는 '에렌델'이라 한다.
빛의 속도로 가도 129억년이 걸린다는 머나먼 곳.
내가 나에게, 내가 당신에게 다가가는 데도
그만큼의 시간이 걸렸던 것이라고 믿어주면, 고맙겠다.

- 송경동 <꿈꾸는 소리 하고 자빠졌네> 시인의 말 중에서


<꿈꾸는 소리 하고 자빠졌네>
송경동 에세이 <꿈꾸는 자 잡혀간다>


#송경동시인

#꿈꾸는자잡혀간다

#꿈꾸는소리하고자빠졌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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