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지은 '이쯤에서'
이모가 왔다 겨우내 잠들어 있던 정원을 돌봐 주려고
엄마의 정원인데
지난겨울부터 내 것이 됐다
엄마에 대해서는 더 말할 수가 없다
이제부터는 엄마의 정원을 내가 가꾸어야 한다는 것밖에는
나는 더 말할 수가 없다
이모는 장미 가지 하나를 잘라 내며 말했다
죽은 가지를 이렇게 자르면
여기, 옆으로 새로운 가지가 생장할 거야
여기, 옆으로 이렇게 쭈욱- 자라날 거야
이모는 두 번째 손가락을 들어 허공을 가르며 동그라미를 그렸다
여기, 이쯤에서 꽃이 필 거야
이모가 그린 동그라미 속으로 그날 밤 내 꿈이 따라 들어갔다
어느새 엄마는 저녁을 하고 있었고
식탁에는 장미 한 송이가
꿈에서도 조금 시들고 여전히 싱싱한 장미가
이모가 말한 장미라는 것을 알았다 그때 엄마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웃고 있는 것 같았다
허공에 핀 장미를 바라보듯이
또 다른 무언가를 바라보듯이
꼭 본 것처럼 웃는 엄마를
나는 다 아는 것처럼
같이 웃어 보았다
- 최지은 '이쯤에서'
여기, 이쯤에서 꽃이 필 거야.
여기, 이쯤에서 너를 만날 거야
여기, 이쯤에서 꿈이 자랄 거야
여기, 이쯤에서 길을 찾을 거야
여기, 이쯤에서 비가 내릴 거야
여기, 이쯤에서 넘어지기도 할 거야
여기, 이쯤에서 강을 건널 거야
여기, 이쯤에서 젖은 옷을 말리고
숨을 돌릴 거야
여기, 이쯤에서 고개를 넘고
여기, 이쯤에서 열매를 맺을 거야
여기, 이쯤에서 잎을 떨구겠지
그리고 여기, 이쯤에서
우리는 만날 거야, 다시!
그러니 잊지 마
여기, 이쯤에서 내가 기다리고 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