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관적 ‘의견’과 객관적 ‘사실’이 혼재할 때 사진은 ‘사실’의 증거로 작용한다. 사진가의 시선에 따라 증거 총량이 변하지만, 다큐멘터리 사진 대부분은 예술보다는 기록과 증거에 충실한 매체다. 이런 이유로 다큐멘터리 사진은 우리가 외면했거나 보지 못한 사실을 따라가 불편한 감정을 주기도 한다. 책에는 늙고 병든 할머니 21명을 찍은 사진이 등장한다. 사진 111장이 들어간 303쪽 책은 일견 사진집이다. 한쪽을 넘길 때마다 사진이 거의 매번 등장한다. 관련 정보가 없는 타인에게는 재미없고 어쩌면 의미 없는 사진이다.
나는 위안부가 아니다 | 안세홍 사진·글 | 글항아리 | 1만 9000원 | 2020.07.10
저자 안세홍은 사진에 이야기를 더했다. 할머니 21명이 직접 몸으로 겪은 이야기다. 바로 2차 세계대전 시절 일본군에게 '강간'당한 여인들 이야기다. 할머니들의 국적은 일제가 침략했던 한국·중국·필리핀·인도네시아·동티모르 같은 아시아 지역이다. 특히 인도네시아·필리핀·동티모르 출신 할머니들이 사는 곳은 대부분 그 나라의 오지였다. 일본군은 이곳까지 들어와 총칼로 위협하고 12세(우리나라 초등학교 5학년에 불과한) 소녀까지 유린했다. 연합군 반격으로 보급이 끊기면서 '돌격 1호'라 불리던 콘돔 배급이 중단됐다. 그러자 일본군은 임신이 되지 않는다는 황당한 이유로 생리를 시작하지 않은 어린 소녀를 성노예로 동원했다.
길을 걷다가, 집에 혼자 있다가, 부모와 함께 있어도 강제로 끌고 갔다. 부모를 죽인다고 위협하고(프란시스카, 동티모르), 1살 된 어린 딸이 죽을까 봐(웨이사오란, 중국)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일본도에 허벅지를 찔리고(셍아, 인도네시아), 일본군이 휘두른 칼에 귀가 잘렸다.(페덴시아, 필리핀) "나는 개나 말하고 똑같았어요."(프란시스카, 동티모르) 이 말처럼 할머니들은 일종의 전리품으로 살았다.
종전 후 할머니들에게 이웃의 멸시는 또 다른 고통이었다. 이슬람 문화권인 인도네시아의 타자 할머니는 명예살인이 두려워 아버지 사망 이후에야 일본군에게 당한 일을 말했다. 웨이사오란 할머니는 3달 만에 일본군 아이를 밴 채 도망쳤다. 마을 사람들은 출산한 아들을 일본군 자식이라며 비웃어 결국 아들도 혼자 살 수밖에 없었다. 제대로 된 피해보상을 받지 못한 런란어 할머니는 "난 이 일이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중국 정부가 더 문제예요."라고 말한다. 아직도 피해는 고스란히 개인의 문제로 남았다.
안세홍은 1996년부터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들을 주목하고 사진으로 기록 활동을 시작했다. 25년간 아시아 5개국 출신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140명을 만났다. 2012년 일본 니콘 살롱에서 『겹겹-중국에 남겨진 조선인 위안부 여성들』이란 사진전 준비 중 일방적 취소를 당했다. 재판을 통해 전시회는 열렸지만, 각종 규제를 받았다. 이후 신문 잡지를 통해 이슈화되며 일본에서 30회 이상 전시를 했다. 안세홍 사진가는 한국과 중국의 피해 여성만 언급해 동남아시아 피해는 많은 일본인이 모른다고 했다. 이로 인해 국제사회에서 한일 간 감정적 역사문제로 보는 폐해가 생겼다. 전 아시아 문제로 풀기 위해서라도 각국 피해자의 목소리가 사라지기 전에 기록되고 알려져야 한다고 말한다. [빈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