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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빈모 Aug 21. 2020

사랑한다 루비아나

사진가 박찬원, 할머니 경주마 생의 끝자락을 사진 찍고 이야기하다.

말(言) 없는 말(馬)에게 말없이 다가가 사진으로 말을 걸었다.


책 표지 사진에 나온 말은 삐쩍 마른 모습이다. 엉치뼈가 드러났고 둥글게 보여야 할 등판은 등뼈가 솟아 올라 긴 산등성이처럼 뾰족해졌다. 회색 말인 줄 알았는데 백마였다. 잔털은 빠지고 흰 털이 성기게 남아 피부색과 겹쳐 회색으로 보였다. 그나마 남은 털도 윤기 없이 거칠었다. 그 암말 이름은 '루비아나'였다.


'루비아나'는 서러브렛(Thoroughbred) 품종 백색 경주마다. 1999년 2월 22일 미국 렉싱턴에서 태어났다. 2007년 12월 3일 한국으로 입양되어 새끼 여덟 마리를 낳았다. 2017년 4월 15일 제주도 대성목장에서 죽었다. 미국에서 두 살 때 처음 경마에 출전해 5년간 경주마로 뛰었다. 대회에 17번 참가해 우승 3번, 준우승 3번, 3위 3번 했다. 총 획득 상금은 11만 4190 달러다.


사진가 박찬원은 새끼 낳는 역할도 끝나 다음 세상을 기다리는 루비아나의 마지막 7개월을 지켜 봤다.

사진가는 루비아나 나이 17살에 만났다. 보통 자연 수명이 21세 지만 그때까지 사는 말은 거의 없다. 그러니까 사람 나이 70살 노인과 만난 셈이다.

루비아나는 너무 늙어 승마는커녕 관광용, 짐 운반용으로도 쓸 수 없었다. 씨받이 역할도 끝났다. 그저 죽는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사랑한다 루비아나/글·사진 박찬원 / 류가헌 /1만 5000원/2020년 03월 17일 출간

몸과 다리는 근육이 줄었지만 머리를 받치는 목은 아직 튼튼하다. 그래서 머리가 더 커 보인다. 움직임이 둔하고 힘은 사라졌지만 생각은 넓어진다. 사진가는 이렇게 생각했지만, 말은 확인해 주지 않았다. 그저 사진가의 생각이다.


마지막 사진을  찍고 제주도를 나온 다음 날 루비아나는 쓰러졌다. 하루 정도 버티다 숨을 거두었다. 사진가는 마지막 모습을 보기 원했지만 보지 못했다. 아니 보여주지 않았다. 목장 주인은 루비아나를 묻어주고 막걸리 한 병 부으며 명복을 빌어주었다 했다. 사진가는 멍해진다. 의욕이 없다. 찍을 사진도 없다. 기력도 떨어진다. 친구가 내 영혼도 조금 떼어갔다.(이 문장이 멋지다고 나는 생각했다.)


죽기 2개월 전 루비아나가 쓰러졌다. 늙은 말이 누우면 죽는다는 이야기가 있다. 사진가는 반사적으로 사진기를 들었다. 눈도 감고 숨도 쉬지 않는 듯한 루비아나, 죽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정신없이 사진 찍는다. 참 못됐다. 말의 눈꺼풀이 바르르 떨린다. 움직인다. 안 죽었다. 싱싱한 풀을 주니 받아먹는다. 그리고 힘겹게 일어난다. 사진가의 욕심을 알지만 보여주긴 싫었다. 대신 죽음 연습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사진가의 마음속에는 루비아나가 항상 살아 있다.


사실 루비아나는 세 번 죽을 뻔했다. 씨받이 역할이 끝나면 자연스레 퇴출(강제로 죽게) 된다. 주인이 차마 보내지 못해 그냥 삶을 잇게 하고 있었다. 두 번째는 병들어 수의사가 왔다. 수의사는 안락사시키자고 했다. 주인은 동의했다. 마침 수의사가 안락사 약을 가져오지 않았다. 나중에 오겠다고 했다. 다음날 사진가 박찬원이 왔다. 사진가는 부탁했다. 자연사할 때까지 키워달라고... "이 말이 죽을 운명이 아닌가 보네요." 주인은 선선히 승낙했다.  보이지 않는 손이 운명을 좌우한다.


루비아나 마지막으로 임신새끼 조산되어 죽었다. 그 후 다시 임신하지 못했다. 루비아나의 새끼 8마리 중 첫째와 둘째만이 경주마로 성과를 냈다. 부산 경마에 출전하고 있는 아들 말이 왔다. 체격은 괜찮아 기대가 되는데 병이 나 치료 위해 고향 목장으로 왔다. 사람들은 쉽게 잔인한 말을 하기도 한다. 어미 말이 죽으면 새끼 말이 잘 달린다는 속설이 있다. 마지막으로 어미가 기를 준다고 믿는다. 허무맹랑하지만 그렇게라도 믿고 싶은 게 경주마의 세계다. 루비아나가 죽었다. 사람들은 새끼 실적을 기대한다.


사진가 박찬원은 성균관대 경영학과 졸업 후 상명대 예술디자인 대학원에서 순수사진을 전공했다. 사진뿐만 아니라 수채화도 그리고 최근에 [한국산문]을 통해 수필가로도 등단했다. 사진 개인전 9회, 수채화 그룹전 20여 회를 했다. 사진, 수채화, 수필 모두 동물이 주제다. 동물을 통해 '생명의 의미', '삶의 가치'를 찾는 작업을 한다고 밝혔다. 사진 산문집인 이 책은 글쓴이가 수필가이어서 인지 글이 담백하고 정제되어 있다. 이 책은 자칫 감상에 흐르기 쉬운 글을 사진이 잡아주고 또한 글이 사진을 보완해 준다.


『눈도 감고 숨도 쉬지 않는 듯한 루비아나, 죽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정신없이 사진 찍는다. 참 못됐다.』 이 문장을 보고 사진을 찍는 일부 사람들이 멀쩡한 나무를 자르고 새집을 드러내 새 사진을 찍는 것을 정당화하는 글로 삼지 않기를... 박찬원은 그냥 지켜봤다. 그리고 루비아나의 마지막인 줄 알고 정신없이 사진을 찍었고 기록했다. 그러면서도 이 행위가 "참 못됐다."라고 자각하고 있었다.

『자각하고 지켜보기, 그리고 그 흐름에 개입하지 않기』 그게 자연 속 동물을 사진 찍는 사람의 기본자세다. [빈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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