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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빈모 Jan 01. 2022

서대문 통술집 폐업 전 뒷 이야기

코로나 19로 장사 못해, 60년 일해 마련한 아파트 팔아 임대료 냈다.

2021년 마지막 날인 12월 31일 저녁 서대문 통술집에서 저녁으로 돼지 목살 구워 먹었다. 지난 29일 나는 '문 닫는 서대문 통술집' 제목으로 브런치에 글을 올리면서 30일 마지막 장사한다고 알렸다. 뒤늦게 소식들은 회사 동기가 마지막 날인 30일 점심에 이곳에 갔다 온 뒤 2022년 1월 3일 저녁까지 연장 영업한다고 알렸다. 그래서 31일 저녁 야근하는 동료들과 함께 통술집을 찾았다. 4명이 돼지 목살 3인분과 소주 1병, 그리고 공깃밥과 함께 나오는 된장찌개(점심 메뉴인 된장찌개보다는 양이 작다)를 먹었다.

돼지 목살 구이

주인인 고수덕(85) 할머니는 식재료 소진을 위해 3일까지 연장 영업한다고 말했다. 토요일이자 신년 휴일인 1일은 쉬고 일요일(2일)과 월요일(3일) 장사한다고 했다. 저녁 시간 코로나 19로 모임 제한이 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손님이 있었다. 다들 계산을 하면서 몇 년 단골이라는 둥, 직장 옮겨서 못 왔다는 둥, 통술집과 인연을 할머니에게 말하고 있었다.

코로나 19로 60년간 운영한 통술집을 폐업하는 고수덕 할머니.          2022년 1월 3일까지 연장 영업 알리는 인쇄물.

할머니는 19년 전 작고한 남편과 4남매를 키웠다. 딸, 아들, 딸, 아들 이렇게 건너가면서 4남매를 잘 키워냈다. 남편은 죽고 없지만 할머니는 자식들 덕 보지 않고 따로 혼자 살면서 통술집을 운영해왔다. 얼마 전 넘어져 다친 허리에 지지대를 착용하고 있었다. 뼈가 부러져 수술까지 해 자식들이 일을 그만하라고 말렸지만 할머니는 고집스레 가게에 나왔다. 결국 딸이 나와 일을 도와주고 있었다.

https://www.khan.co.kr/feature_story/article/200512271816221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03050701014505099002

1961년 통술집을 시작한 것은 순전히 할머니 자신의 의견이라고 했다. 당시 전남 광양에서 친정아버지가 서울 구경을 위해 상경했다. 남편이 장인을 모시고 창경궁(당시 이름은 창경원이었고 지금은 서울대공원으로 옮긴 동물원이 있었다. 봄에는 일제강점기 때 심어진 벚꽃이 만개해 현재 여의도에서 열리는 벚꽃놀이 행사가 성황을 이뤘다.)을 갔는데 우연히 산 복권이 당첨되었다. 상금 60만 원(당시는 화폐단위가 '환(圜)'이었다.)을 받자  남편은 철물점을 하고 싶다 했지만 자신이 음식점을 하겠다고 주장해 남대문에서 백반집을 시작했다.


참고 사항 : 1961년 5월 17일 서천의 쌀값은 1820원. 1979년 10.26 사태 다음날인 27일엔 쌀 한 가마니 값이 38000원이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땐 8만 4000원 정도였고 2002년 월드컵 때는 15만 2000원으로 기록됐다. https://www.newssc.co.kr/news/articleView.html?idxno=27961 현재 가격은 롯데마트 가격으로 최하 80kg 32만 원 선이다.



처음에는 남대문에서 시작해 마포로 옮겨 돼지갈빗집을 하다가 시장이 철거되면서 1963년 서대문으로 옮겨 지금까지 이어졌다. 서대문에서 시작할 때는 드럼통 4개를 놓고 시작했다. 당연히 의자는 없는 소위 '서서갈비집'이었다. 자리가 없으니 합석이 일상사였다. 먼저 온 손님이 구운 고기를 늦게 온 손님에게 양보하고 나중에 온 손님의 고기를 먹는 식으로 처음 본 사람끼리도 스스럼없이 어울려 술을 먹는 공간이었다고 할머니는 말했다. 대학생은 학생증 맡기고 회사원은 시계 맡기고 가기도 했는데 안 찾아가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고 했다. 심한 경우 고장 난 시계를 맡기기도 했다고 한다. 그래도 인심을 잃지 않아 손님은 계속 이어졌다.


남편은 남창동에 있던 구두공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남편은 공장 퇴근 후 통술집 일을 도와주었다. 통술집을 시작할 때 독립문 위쪽 판자촌에서 살고 있었고 큰 아들이 태어났을 때였다. 당시 할머니는 돼지고기 한 근을 5조각 내는 식으로 해서 돼지 갈빗살 한 대에 100원, 맥주컵보다 조금 작은 컵으로 소주 1잔 50원에 팔았다. 한마디로 안주는 원가에 가깝게 팔고 술에서 마진을 남기는 장사를 했다. 돼지갈비만 따로 팔지 않아 자연히 술 매상이 늘었다. 장사가 잘 되자 건물 주인이 다른 곳으로 이사하면서 살림하던 공간을 터서 길게 매장을 늘렸다. 현재 1층이 길게 두 공간으로 나뉘어 있는데 오른쪽이 처음 시작한 공간이다. 그 뒤 점점 늘려 약 8년 전 왼편 공간도 통술집이 임대해 사용하고 2층까지 확장했다. 여기서 돈을 벌어 자식들 공부시켰고 모두 다 살림을 따로 냈다. 자신은 독립문 삼호아파트 33평에서 혼자 살았다.

그러나 코로나 19 유행이 닥치면서 가게를 확장한 것이 독이 되었다.

2층까지 사용하는 통술집이 되자 자연스레 임대료도 올라갔다. 현재 한 달에 1280만 원을 내고 있다. 코로나 19 팬데믹이 닥치자 저녁 장사가 없어지다시피 했고 2층은 거의 매일 빈 공간이 되었다. 2층을 사용 안 하면서 임대료를 줄이려고 했지만 주인은 임대료를 늦게 받을 수는 있어도 깎지는 못한다고 했다. 결국 지난 2년간 수입은 적은데 빈 공간 임대료를 내는 상황이 이어졌다.

결국 고수덕 할머니는 평생 일하면서 마련한 자신의 아파트를 팔아 임대료를 내게 되었다. 지난 2021년 4월 독립문 삼호아파트(33평)를 9억 8000만 원에 팔았다. 부동산 급등에 따라 가격이 오른 상태라고 생각해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8월에 팔았다면 더 받을 수 있었을 거라며 아쉬워했다.

통술집을 60년 동안 운영하면서 4남매를 키워냈고 자신의 재산으로 아파트를 마련했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물러갈 기미가 보이지 않자 결국 아파트를 팔아 임대료를 내고 이제 통술집 문을 닫기로 한 것이다. 할머니는 딸이 사는 근처인 화곡동에 집 크기도 줄여 24평 아파트를  전세로 얻었다. 자신의 집은 없어진 셈이다.

찾아온 손님들이 아쉬워하고, 오지 못해 편지만 보낸다는 손님도 있고, 할머니 자신도 마음이 아프고 계속 일하고 싶어 이 근처라면 다른 곳이라도 자리 잡고 장사를 계속하고 싶다고 했다. 통술집 이어 하겠다는 자식은 없냐고 물으니 다들 식당일이 너무 힘들기도 하고 특히 코로나 19 상황에서는 못한다고 할머니는 말했다. 더욱이 가족끼리 운영하면서 이렇게 큰 공간을 유지하기는 어렵다고 했다.


코로나 19 팬데믹은 대한민국에서 많은 것을 변화시켰고 많은 것을 사라지게 했다.

60년을 이어온 통술집도 ‘2016년 서울 미래유산’인 통술집도 사라졌다. [빈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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