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빠와 딸의 좌충우돌 미국 여행

계획부터 삐걱대는 우리 사이

by 신잔잔

아빠는 아주 예전부터 딸바보였다, 요즘 시대에 딸바보는 흔하지만, 내가 어릴 때는 그런 용어도 없었을 정도로 아직은 딸과 아들의 선호도가 비슷할 시기였다. 아마 지금의 딸바보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가 아니었나 싶다.


아빠는 내가 태어나고 나를 처음 보러 왔을 때 양복을 입고 왔다고 했다. 나를 처음 만나는 순간이 멋있어 보여야 한다고 생각해서였다. 아빠가 화장대 앞에서 스킨을 바르고 있을 때에는 내가 그 발 뒤꿈치로 가서 앉아있는 두세 살 때의 사진도 있다. 샤워 후 머리를 말리기 귀찮아하는 것을 보곤, 감기 드니깐 씻자마자 말려야 한다며 아빠가 직접 내 머리를 말려주기도 했다. 그만큼 아빠와 나는 아주 끈끈한, 그런 부녀지간이었다.


너무 좋아하던 아빠의 발 뒤꿈치


이렇게 서로를 좋아하던 우리 사이였지만, 사춘기만큼은 피해 갈 수 없었다. 키가 자라고 2차 성징이 오면서 다른 수많은 부녀 지간처럼 아빠와 나 사이도 조금씩 멀어졌다. 엄마와는 여전히 가까웠는데 아빠와는 갈수록 왜 맞지 않는 일들이 많아졌는지. 나는 여전히 아빠를 사랑하고 존경했지만, 그것과 불편함은 별개의 몫이었다. 성인이 된 이후로는 대화가 더 많이 줄어들었고 나 또한 말 못 할 비밀들이 늘어나면서 자연스레 거리감이 생겼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그런 글을 보았다. 아빠들은 나이가 들고 회사의 높은 자리에 가게 되면 자연스레 회사에서 불편한 왕따가 되고, 집에 들어오면 가족들과 시간을 많이 못 보냈던 탓에 엄마와 자식들 사이에서 은따가 되기 때문에 불행하다는 것이다. 아빠가 생각났다. 아빠도 지금 본인이 '은따'라고 느끼지는 않을지 걱정되었다. 이미 깊은 대화를 나누기엔 멀어져 버린 아빠에게, 지금 아빠는 행복한지 물어볼 자신이 없었다.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 생활을 하게 된다면 지금보다도 더 시간이 없을 것이 분명했다. 그전에 아빠와 지금보다는 더 가까워져야겠만 했다. 아빠에게 제안했다.


"내가 미국 여행 영어 가이드해 줄게, 아빠. 같이 가자."


그렇게 우리는 기대감 반, 어색함 반이 예상되는 8일간의 미국 여행을 확정 지었다.




"내가 계획도 알아서 세우고 가이드도 해주겠다고 얘기했잖아. 여행 전까지만 세우면 거 아니야. 나 좀 믿고 기다려봐 봐!"

"너를 못 믿으니까 그렇지. 계획을 뭐 얼마나 대충 세우려고 그래!"

"내가 다 알아서 할 거야. 좀 내버려 둬!!!"


아직 한 달이나 남았는데, 우리는 벌써부터 싸우고 있었다. 친구 같은 엄마와 딸의 싸움은 종종 있었지만 그래도 아빠와의 싸움이라니, 나름 신선하다. 대화를 안 하던 때보다는 나은 건가?


내가 알아서 하겠다고 말은 했지만, 계획을 짜기 귀찮아 차일피일 미루고 있던 실정이었다. 여행을 갈 때면 한 일주일 전쯤부터 슬슬 계획을 짜기 시작하는 나인 반면, 아빠는 미리 모든 것이 정해져 있어야 마음이 편한 사람이었다. 아빠의 그런 모습쯤은 잘 알고 있었다. 내가 미적대다 보면 답답해서 나보다 먼저 계획을 세운 후 통보할 것이 분명했다. 그러면 나는 못 이기는 척 왜 아빠가 짰냐고 투덜거리며 그 계획에 따라줄 예정이었다. 결국 내가 가이드라고 말만 했지, 사실 나는 그냥 영어만 담당하고 나머진 아빠가 전부 담당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어쩔 수 없다. 일찍 일어난 새는 더 일찍 피곤해지는 법이니까.


역시나 얼마 후 아빠는 우리가 여행할 일정에 대해 세세하게 기록해둔 표를 짜서 나에게 건네주었다. '역시 내 계획대로 되어가는군.'이라는 생각도 잠시, 아빠의 계획표를 보자마자 나는 경악하고야 말았다. 30분 단위로 계획표를 짜 둔 것이다. 보자마자 피로가 쌓이는 계획표였다.


"아빠, 우리가 가는 거.. 자유여행이야. 이 스케줄은 패키지여행보다 더 빡빡하잖아..."

"그래도 그 돈 내고 갔으면 구경할 수 있는 건 다 구경하고 와야지. 네가 뭐라 할까 싶어서 몇 개는 그나마 뺀 거야!"


잠시 잊고 있었다. 요즘 유행하는 MBTI로 따지면 아빠는 극한의 J, 나는 J와 P 사이의 그 애매한 어디쯤에 속해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한숨만 나왔다. 여행이 아니라 노동을 할 것이 눈앞에 선했다. 괜히 같이 가자고 한 걸까, 약간의 후회도 들었다.


아빠는 자칭 가이드라고 말하는 나를 위해 같이 갈 음식점 몇 개 정도는 나보고 정하라고 하였다. 나름의 본분에 충실하기 위해 주위 친구들에게 뉴욕의 맛집을 물어보았다. 그러면서 나의 여행 메이트를 이야기하니 모두들 신기해했다. 엄마와 딸도 아니고, 아빠와 딸의 여행은 잘 본 적이 없는 것 같단다. 거의 분 단위의 스케줄을 아빠가 벌써 다 만들어 놓았다고 하니, 요즘에 환갑이 넘은 아저씨들 중 그런 걸 할 줄 아는 사람은 많이 없다고 했다. 생각해보니 그런 것도 같다. 귀가 얇은 나는 갑자기 또 아빠에게 짜증을 낸 것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어느덧 우리가 함께 갈 여행 날짜는 눈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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