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대략 13년 전 김 씨가 미국 유학하던 시절이다. 국산인 김 씨가 미국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것은 바로 ‘달러’였다. 등록금과 생활비를 합쳐 어마무시한 달러가 필요했는데, 그 어마무시한 달러를 현금으로 챙겼을까? 아니다! 소액의 현금만 달러로 환전했을 뿐. 어마무시한 달러를 현금으로 챙길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바로 한국과 미국이 ‘금융 시스템’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김 씨의 부모님이 은행을 통해 송금하면, 거의 실시간으로 김 씨는 달러를 손에 넣을 수 있다.
이렇듯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하나의 경제 시스템 안에서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지난번 월러스타인의 세계체제론에서 알 수 있었듯이, 전 세계의 자본과 노동력은 모두 세계도시로 흘러들어 간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금융’이다. 정보통신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옛날 대항해시대처럼 무거운 금과 은을 배에 실어 나를 필요가 없다. 요즘 같은 때는 클릭 한 번으로 세계 어디든 송금이 가능하다. 송금뿐만이랴. 주식 투자도 글로벌해졌다. 해외 주식에 투자하기 위해 복잡하게 증권사를 찾아갈 필요도 없다. 손쉽게 방구석에 앉아서 애플 주식을 살 수 있다.
세계 디지털 송금 규모와 주식시장 점유율
세계적인 도시들을 잠시 떠올려 보자. 당연히 서구권에서는 뉴욕, 런던, 파리 등이 있겠고, 동양에서는 도쿄, 서울, 상하이, 싱가포르, 홍콩이 있겠다. 이러한 세계도시들의 공통점은 바로 도시 내에 금융 허브가 있다는 점이다.
우리나라만 봐도, 1인당 GRDP(지역 내 총 생산: 지역 버전의 GDP라고 보면 되겠다)는 울산이 22년 기준 7,623만 원으로 가장 높다. 울산에는 중공업, 석유화학, 자동차 산업 등 제조업 시설이 밀집되어 있다. 그렇지만 울산을 세계도시라고 하지는 않는다. 자본의 흐름을 통제하는 금융 허브가 없기 때문이다. 국내에서 세계도시 축에 들 수 있는 것은 전 세계의 자본이 쉼 없이 오고 가는 서울뿐이다.
우리나라 금융의 중심 여의도
이는 그동안 세계가 겪어 온 산업구조의 변화와도 관련이 있다. 과거 물류의 중심지, 혹은 제조업 중심지로서 성장했던 뉴욕, 런던과 같은 세계도시들은 이제 더 이상 물리적인 제품의 생산의 기지가 아니다. 각광받던 제조업이 지고 고부가가치를 낼 수 있는 지식 산업이 등장하면서, 세계도시의 공장은 밖으로 이동하였고, 세계 자본 흐름을 통제할 수 있는 금융 허브가 그 빈자리를 대체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전문직 고소득 인력이 세계도시로 모여들고, 이들이 쾌적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도시환경이 갖추어진다.
이렇듯 세계도시체제는 서로 다른 역사적, 지리적 환경에도 불구하고 유사한 금융 중심의 세계도시를 형성한다. 그렇다면, 세계도시의 사람들은 모두가 행복할까? 세계도시의 형성은 도시 내 사람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오늘의 사회학자는 이 연재글에서 최초로 만나는 여성 사회학자이다. 이 분에게 세계도시를 바라보는 렌즈를 빌리러 가보자!
2. 사센의 세계도시론
사스키야 사센(Saskia Sassen)은 단일한 세계도시체제를 설명하는 데 가장 영향력 있는 사회학자라고 할 수 있다. 원래 사센의 초기 연구 주제는 제3세계 이민자들의 선진국 대도시 유입이었다. 노동력이 어떻게 선진국 대도시로 흘러가는지 살펴보고자 했다. 이를 더 발전시켜서 1991년에는 대표적인 대도시인 뉴욕, 런던, 일본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연구의 초점을 맞추며 구체적으로 세계도시에 대한 논의를 열었다.
사센은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개별 대도시의 공간적 변화를 설명하고자 했던 기존의 연구들과 달리, 세계화로 서로 연결된 주요 도시들의 구조적 변화를 설명하는 새로운 접근방법을 제시하였다. 그녀의 세계도시 연구는 1994년 집필한 ‘세계도시와 경제(Cities in a World Economy)’에 잘 집약되어 있다. 여기에서 사센은 더 나아가 세계도시 내부에서 발생하는 사회, 경제, 인종적 양극화로 그 논의를 확장하였다.
사스키아 사센과 그녀의 저서 '세계도시와 경제'
사센에 따르면 세계도시(global city)는 ‘거대한 초국적 기업의 본사가 위치하고, 금융, 기술, 전문 서비스가 풍부한 중심 도시’라고 할 수 있다. 과거 대도시들은 주로 무역 중심지나 공업 중심지 역할을 담당했지만, 세계화 시대에 세계도시는 다음 4가지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1. 세계 경제에 대한 방향 제시와 정책 수립의 중심 사령부(command posts)
2. 경제 개발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금융 및 전문화된 서비스 기업들의 밀집
3. 새롭게 확장되고 있는 산업의 생산과 혁신의 중심지
4. 금융 및 서비스 산업이 생산하는 산업을 사고파는 시장의 입지
사센이 연구했던 뉴욕, 런던, 도쿄는 서로 상이한 지리적 위치와 역사적 경험을 지니고 있지만, 지난 20~30여 년 동안 세계화를 겪으며 비슷한 특징을 가지게 되었다. 먼저 이 도시들은 세계경제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세계경제의 조정자 역할을 수행해 왔다. 세계경제가 뉴욕, 런던, 도쿄의 증권거래소의 향방으로 큰 영향을 받는다는 점에서 이를 알 수 있다. 뉴욕발 금융위기 때를 생각해 보면 그 영향력이 얼마나 큰 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고등학교 세계지리에 나오는 세계도시 지도
또한, 세계도시에서는 공장을 돌려서 물리적인 상품을 생산하기보다 전 세계에 흩어져있는 공장과 사무실을 관리하는 데 초국적 기업들의 본사가 밀집해 있다. 현대자동차 같이 세계적 기업을 보면, 본사는 세계도시 안에 위치하지만 실제 공장은 브라질, 러시아, 터키, 인도 등 전 세계에 위치해 있다. 이러한 산업을 선도하는 초국적 기업들의 본사가 밀집한 세계도시는 자연스럽게 생산과 혁신의 중심지가 된다. 아무리 애플 제품이 중국에서 생산된다 하더라도, 애플의 신제품이 최초 공개되는 것은 애플 본사가 위치한 캘리포니아 쿠퍼티노이다. 세계도시의 금융업과 전문서비스업은 이러한 초국적 기업들의 생산 활동과 자금의 흐름을 관리하며 전 세계를 연결시키는 금융허브로 만들어낸다. 세계도시의 특성들은 시너지효과를 내며 세계화 흐름 속에서 도시의 경쟁력을 공고히 한다.
현대자동차그룹 해외 공장 현황 (증권경제신문)
여기까지 살펴봤을 때, 세계도시의 등장과 그 역할에는 큰 문제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사센은 세계도시 내부로 들어가 돋보기로 세계도시를 구석구석 살피는데, 그녀가 발견한 세계도시의 문제점은 바로 양극화였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대로 계층 구조는 크게 상류층, 중산층, 저소득층으로 나눌 수 있다. 중산층의 기준이 높아진 지금, 우리는 중산층 하면 흔히 화이트칼라 사무직을 떠올리는데, 생각보다 중산층을 성장시키는 것은 제조업 생산직이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는 과거 디트로이트 자동차 산업 단지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중산층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도 경제호황기 때 경험한 것처럼, 제조업의 성장과 함께 중산층이 두터워졌다. 누구든지 공장에서 착실하게 일하고 돈을 벌어 계층 이동의 꿈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디트로이트 생산직 노동자 (Michigan Public)
그러나 앞서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세계도시의 산업구조는 금융과 전문서비스업 위주로 재편되었다. 공장이 없어졌기에 중산층으로 올라갈 발판이 사라졌다. 이에 따라 세계도시 내의 청년들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다른 도시로 이주하거나, 세계도시 내에 남아 고소득 전문직들을 위한 호화 주택, 고급 레스토랑, 호텔 등에서 가정부, 웨이터, 호텔보이 등 저임금 노동을 하게 된다. 여기에 남미와 동남아 등에서 온 이민자들이 미숙련 단순 노동에 합류하여 세계도시의 양극화 문제가 더 심화된다. 즉, 고소득 전문직들과 저임금 서비스직들만 남은 세계도시에서 중산층이 행방불명되고 있는 것이다!
미국 호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민자 메이드 (NBC News)
이렇듯 세계도시는 전문 분야에 종사하는 초국적 엘리트들이 부를 축적하고 권력을 얻는 데 특화된 공간이면서 극단적인 계층 간 불평등이 공존하는 공간인 것이다.
3. 세계도시의 공간적 양극화
세계도시에서 심화된 양극화는 도시 공간에 반영된다. 김 씨가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외국인 노동자로 일하고 있는 누나를 만나러 갔을 때, 깜짝 놀랐던 장면이 있다. 인도네시아의 금융 중심지인 자카르타 시내는 우리나라 테헤란로와 견주어도 지지 않을 만큼 번쩍이는 고층빌딩과 쾌적한 도시 환경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조금만 밖으로 나가도 판자촌과 불법거주지가 즐비한 공간이 나온다.
자카르타의 공간적 양극화 (Bloomberg)
금융 중심의 세계도시화는 자카르타의 사례처럼 공간적 불평등과 계층 간 격리현상을 수반한다. 완전히 양극화된 세계도시에서 부유한 전문직 종사자들과 저임금 노동자들은 주거환경, 교육, 사회생활 모든 면에서 분리되고 있다. 사센은 이러한 현상을 ‘중심부의 주변부화(peripheralization at the core)’라고 표현하였다. 지난번 월러스타인으로부터 배웠던 중심부(core)와 주변부(periphery)를 기억하신다면, 이해가 더 쉬울 것이다. 세계도시 안에서 중심부와 주변부가 분리되는 현상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비단 자카르타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세계도시는 중심 기능을 가진 시내와 시내에서 조금 벗어난 지역의 격차가 심하다.
브라질 제2의 도시인 리우데자네이루는 남아메리카 최초로 올림픽을 개최한 도시로 GDP도 브라질에서 2번째로 높다. 이런 세계적인 대도시인 리우데자네이루 주변에는 파벨라(Favela)라고 불리는 빈민촌이 형성되어 있고, 주민 리우데자네이루 1/5이 이 빈민촌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리우데자네이루의 마천루와 파벨라는 공존하고 있다
뉴욕, 런던, 도쿄를 비롯한 정상급 세계도시도 실상이 다르지 않다. 번쩍이는 대도시의 마천루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슬럼가나 판자촌 같은 빈민층 거주지가 나온다. 우리나라 서울도 조금 맥락은 다르겠지만, 화려한 도시의 모습과 대비되는 반지하, 저층 단독주택 등이 세계도시 서울과 공존하고 있다.
여기 서울 맞다 (한국일보)
다시 말해,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세계도시의 열매는 대도시 일부 고소득층만이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사센은 세계도시의 제조업 쇠퇴, 양극화 심화, 고용구조의 변화로 인한 계층 간의 격차를 불평등한 도시 공간으로 투영하여 설명하며 세계도시의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4. 진정한 세계도시가 되려면?
세계도시는 한 국가에 필적할 만큼 엄청난 영향력과 부를 가져다준다. 세계도시 뉴욕에서 초국적 기업들이 창조해 내는 상품들, 집중된 부의 흐름, 여기서 생활하고 소비하는 고소득 부유층들이 뉴욕을 세계의 중심으로 만든다. 뉴욕 대도시권을 국가로 치면GDP 상 세계 12위 정도로 웬만한 국가급이다. 그렇기에 국가 차원에서 기를 쓰고 세계도시의 경쟁력을 키우고자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GDP로 본 세계도시 순위
서울 역시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의 상처를 거치면서도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고, 세계적인 기업들과 증권가가 위치한 아시아 대표 세계도시이다. 이러한 세계도시로의 발판을 위해 서울은 2006년부터 미국 AIG 그룹과 손잡고 서울 여의도 국제금융센터(IFC) 개발을 시작했다. IFC 덕분에 전 세계 도시를 대상으로 조사하는 국제금융센터지수(GFCI)에서 2015년에 6위까지 올라간 바 있다. 이 과정에서 서울시는 33,000㎡ 부지를 AIG에 99년간 장기임대할 수 있도록 특혜를 주었다. 하지만, IFC 개발 이후에도 서울에 해외 금융회사 유치는 지지부진하였다. 반면에 AIG는 2016년에 IFC를 매각하고 손을 털면서 차익으로 8,960억 원을 얻었다.
여의도에 위치한 IFC (IFC Seoul)
해외 금융회사 유치에 번번이 고배를 마셨지만, 여전히 서울은 금융에 진심이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2030년까지 서울을 전 세계 5위권 글로벌 금융도시로 만들겠다는 원대한 목표를 제시하며, 뉴욕 세계무역센터를 본뜬 듯 한 용산국제업무지구 개발계획(안)을 발표하였다. 과연 서울은 용산 개발과 함께 세계도시체제의 중심 도시로 도약할 수 있을까? 서울시의 계획대로 용산에 100층 내외의 랜드마크타워가 들어서면서 된다면 모두가 행복할까? 서울의 원대한 계획 안에는 아무리 봐도 서울의 빈부격차와 양극화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없다.
용산국제업무지구(안)
사센은 거대한 부와 권력을 창출하는 세계도시체제가 도시 내 공존하는 극단적인 빈곤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하였다. 물론 세계화의 흐름에서 세계도시로 나아가지 말자는 것이 아니다. 이제는 우리가 저 너머 세계를 멀리 바라보는 것만큼 바로 우리 옆에 있는 불평등함 역시 함께 인식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진정한 세계도시가 되기 위해 떠나는 길에서 행방불명된 중산층들을 찾으러 가보자!
양극화를 넘어선 세계도시 서울은 가능할까?
사스키아 사센(1947 - )
세계도시에 대한 새로운 연구의 틀을 제시한 사센의 초기 연구 주제는 세계적 흐름에서의 노동력과 자본의 이동이었고, 이후 세계도시체제와 세계도시 안에서 발생하는 양극화, 세계화와 불평등으로 확장되었다. 이러한 사센의 연구는 대다수 세계도시에서 볼 수 있는 사회·공간적 변화를 해석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녀의 연구 주제만큼 사센은 굉장히 글로벌한 삶을 살아온 것 같다. 1947년 네덜란드에서 태어난 사센은 가족을 따라 아르헨티나, 이탈리아, 프랑스, 미국 등 세계 여러 나라를 거치며 생활해 왔다. 이때의경험으로 사센은 대도시의 화려한 모습과 그 대도시 속 빈곤층의 처참한 모습이 공존한다는 것을 관찰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미국 노트르담 대학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사센은 시카고대학을 거쳐 컬럼비아대학교 사회학 석좌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2014년에는 프로스펙트매거진에서 선정한 50인의 세계사상가로 선정되어 세계적 학자로서의 명성을 증명하였다. 여담이지만 그녀의 남편도 저명한 사회학자인 리처드 세넷(Richard Sennett)이다.
단일 경제에 기반한 해석으로 세계화의 다양한 측면을 바라보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비판도 있지만, 그녀의 세계도시론은 여전히 사회학 교과서의 핵심 개념으로 다뤄지고 있고, 세계화와 도시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꼭 알아야 하는 개념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