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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에서 스마트폰 보는 사람들

시민적 무관심

by 김신혁
ChatGPT Image 2025년 10월 24일 오후 05_52_48.png

작품명: 지하철에서 스마트폰 보는 사람들

제작 시기: 아침 출근 시간

재료: 지하철, 스마트폰, 시민적 무관심

설명: 붐비는 지하철 안 승객들의 서로에 대한 무관심을 스마트폰을 향한 시선으로 표현하였다.


1전시실 '이동과 리듬'에서 저희가 만난 첫 작품은 바로 <지하철에서 스마트폰 보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지하철을 타면 뭘 하시나요? 저 같은 경우는 들어가자마자 스마트폰을 꺼내 듭니다. 솔직히 스마트폰으로 뭐 볼 건 없습니다. 슬프지만 연락 오는 건 보통 카드사 이벤트 권유 메시지이고, 뉴스도 이미 본 것들입니다. 그럼에도 중요한 연락 온 듯 메신저를 들여다보고, 아까 본 뉴스지만 심각한 표정으로 댓글을 읽습니다. 왜냐면 이렇게 손바닥만 한 사각틀에 시선을 고정해야만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죠. 어쩌다 눈을 들어 어느 역쯤 왔나 살펴볼 때 맞은편 사람과 눈이 마주치면 재빨리 눈을 다시 스마트폰 쪽으로 내리깝니다. 결코 쫄아서(?) 그런 게 아니라 민망해서입니다.

어른들은 이야기할 때 상대의 눈을 잔잔하게 바라보며 대화를 이어나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도시 생활을 하면서 타인의 눈동자를 바라보는 것은 조심스럽습니다. 도시에서 모르는 사람의 눈을 오랫동안 마주치는 것이 그리 긍정적인 표현이 아니기 때문이죠. 이는 상대방에게 ‘나를 왜 보는 거지? 내 옷이 오늘 좀 이상한가?’ 같이 불편한 상상을 하도록 만듭니다. 그래서 도시에 살아가는 우리는 알게 모르게 다른 사람을 뚫어지게 쳐다보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희 앞에 걸린 <지하철에서 스마트폰 보는 사람들>은 우리의 이런 노력을 섬세하게 표현한 작품입니다.



지하철과 퍼스널 스페이스


여러분 퍼스널 스페이스(personal space)라는 말 들어보셨죠? 저명한 문화인류학자인 에드워드 홀(Edward T. Hall, 1914~2009)이 제시한 개념입니다. 우리에겐 타인에게 침범당하고 싶지 않은 공간적 경계가 있다는 것이죠. 문화권마다 조금씩 다릅니다. 예를 들면, 북유럽 사람들은 버스를 기다릴 때 캉캉춤을 춰도 될 만큼 넓은 간격으로 줄을 섭니다. 한편, 우리나라는 그렇게까지 넓은 간격으로 줄을 서진 않죠.


Tn-bwWCfsUs7VG1AKA3TxXsKnAZh79nymX6YfEq8ro8bK0mvSYOOsM4R2WrTmZ24SdMkjxI1DX_5qLCivGbRyg.webp 북유럽식 버스 기다리는 줄


아무튼 홀이 제시한 일반적인 퍼스널 스페이스는 4단계로 구분됩니다.


1. 공적 거리: 350cm 이상으로 연설이나 공연 등이 이루어진다.

2. 사회적 거리: 120cm~350cm로 직장 동료나 낯선 사람과의 사회생활이 이루어진다.

3. 개인적 거리: 45cm~120cm로 친구나 가까운 사이와의 일상적인 대화가 이루어진다.

4. 친밀한 거리: 0cm~45cm로 가족, 연인 간 포옹이나 속삭임이 가능하다.


그런데 만약 낯선 사람이 내 코앞 30cm 안으로 들어온다면 어떤 느낌일까요? 당혹스럽기도 하고 불쾌하기도 할 것입니다. 이 정도 거리는 신뢰도와 친밀감이 충분히 높아야 허용할 수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밀집해서 살아가는 도시에서 사람들은 이런 퍼스널 스페이스를 자주 침범 당합니다. 그 대표적인 공간이 바로 지하철이죠.

지하철은 '시민의 발'이라고 불립니다. 아마 아무리 외국어와 담쌓은 분이셔도 ‘이번 역은 ㅇㅇ역입니다.’ 정도는 3개 국어로 가능하실 겁니다. 지금 머릿속에 떠오르는 ‘디스 스탑 이즈’, ‘젠빵 따자쉬’ 혹은 ‘마모나꾸’로 시작하는 바로 그겁니다. 그 정도로 지하철이 익숙한 공간이라는 의미죠.

서울의 경우, 연간 24억 명의 이용객을 수송하기 위해 차량이 총 160만 회 운행된다고 합니다(2024년 서울 1~8호선 수송 통계). 지하철 1량당 면적은 56.94㎡라고 알려져 있는데, 보통 지하철이 10량이니까 전체 면적은 대략 569.4㎡ 정도입니다. 좀 뜬금없지만 잠시 수학 시간을 가져볼까요? 연간 24억 명이 이용하고, 160만 회 운행하면 지하철 1회 운행 시 1,500명 정도 탑승한다는 거니까, 지하철 전체 면적을 1,500명으로 나누면 얼추 1인당 0.38㎡의 면적을 차지한다고 계산되네요. 즉, 대충 한 사람에게 주어진 지하철 내의 공간은 61cmx61cm 정도입니다. 조악한 계산이지만 평균적으로 지하철에서는 개인적 거리 안에 타인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출퇴근 시간대에는 이보다 더하죠. ‘지옥철’에 퍼스널 스페이스 따위는 없습니다. 일렬로 놓인 의자에 승객들이 다닥다닥 붙어 앉아 있는 건 물론이고, 그 앞에 사람들이 첩첩산중으로 서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내 몸과 타인의 몸이 민망하게 붙어있는 경우도 부지기수고, 내 옆사람의 숨결이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이쯤 되면 당혹감과 불쾌감을 견디지 못할 만도 한데, 신기하게 지하철 승객들은 마치 벽이 있는 듯이, 붙어 있는 타인들에게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무심하게 목적지까지 갑니다.



시민적 무관심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낯선 사람들과 부대끼는 상황에서도 타인에게 무관심한 모습을 관찰한 사회학자 어빙 고프먼(Ervin Goffman, 1922~1982)은 ‘시민적 무관심(civil inatention)’이라는 개념을 제시했습니다. 시민적 무관심이란 쉽게 말해 ‘보고도 못 본 척, 알아도 모르는 척’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도시라는 공간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찰나의 일시적인 만남을 가지죠. 길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는 사람, 그리고 지금 우리가 작품에서 보는 것처럼 지하철을 함께 타는 사람처럼 말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런 덧없는 마주침은 도시 생활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은 큰 에너지를 소비하기 마련 아니겠습니까. ‘저 사람에게 내 말은 어떻게 들릴까?’ ‘저 사람의 표정은 뭘 의미할까?’ ‘저 손짓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서로 알게 모르게 보내는 신호를 해석하면서 상상의 나래를 펼칩니다. 매우 신경 쓰이는 일이죠. 편의점에서 물건을 사거나 지갑을 떨어뜨린 사람을 멈춰 세우는 것 같이 꼭 필요한 상황이라면 이렇게 대화와 표정, 몸짓을 교환하면서 교류를 시작하겠지만, 낯선 사람과의 찰나의 마주침이라면 굳이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도시에서 매번 타인을 마주칠 때마다 이렇게 에너지를 소비하게 된다면 우리는 집에서 나오자마자 녹초가 되어 버릴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바로 시민적 무관심입니다. 이는 단순히 상대방을 투명인간처럼 무시한다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사회적 교류를 예방하려는 것입니다. "당신을 인식하고는 있지만, 당신의 울타리를 침범하거나 관여하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 불편해하거나 어색해하지 마세요"라는 의미죠. 즉, 공개된 도시에서 벽은 없지만, 보이지 않는 벽을 치고 개인의 사생활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시민적 무관심은 무시가 아니라 오히려 타인을 위한 배려이자 예의입니다. 시민적 무관심 덕분에 신호등을 기다리는 상황이나 엘리베이터에서의 침묵도 어색하지 않게 되죠.



무관심한 지하철 속 관심


지하철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지하철에서 내 옆에 앉은 사람이 나를 계속 빤히 쳐다보고 있으면 어떨까요? 내 핸드폰 화면을 옆에서 같이 본다면? 불쾌하겠죠. 오히려 나랑 눈이 마주쳐도 시선을 돌리고, 핸드폰으로 뭘 하던 서로 관심 갖지 않는 게 편합니다. 즉, 서로 시민적 무관심을 유지하고 있는 덕분에 낯선 사람이 가득한 지하철에서도 숨 막히지 않고 목적지까지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시민적 무관심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시선을 둘 곳이 필요합니다. 과거에는 책이나 신문이었고, 요즘엔 스마트폰이 있습니다. <지하철에서 스마트폰 보는 사람들>에 표현된 것처럼 지하철을 타면 고개 숙인 사람들이 손바닥만 한 사각틀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죠. 어떤 경우는 특별히 스마트폰으로 할 게 없어도 시선 둘 곳이 필요해 저처럼 스마트폰을 괜스레 만지작 거릴 때도 있습니다.

물론 때때로 지하철에서는 상식 밖의 사람을 마주할 수도 있습니다. 앞머리에 커다란 헤어롤을 만 채로 역을 하나씩 지날 때마다 눈·코·입을 새로 그리는 사람, 박쥐처럼 지하철 봉에 매달린 사람, 패션 위크인가 싶을 정도로 옷차림이 난해한 사람, 세상의 종말을 예고하는 사람 등등 말이죠. 이런 상황을 처음 마주했을 때 당황스러워서 시선이 갈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우리는 약속대로 이들을 못 본 척 곧장 스마트폰을 향해 다시 시선을 돌립니다. 스마트폰 덕분에 진짜 웬만한 것이 아니고서야 지하철에서 벌어지는 상황에 무관심을 수월하게 유지할 수 있습니다.


194ee7d7447599b29.jpg 와, 이걸 안 보네...


이런 시민적 무관심이 깨지는 경우가 있는데, 바로 우리의 관심을 필요로 하는 상황에서 입니다. 지하철에서 누군가 쓰러지면 주변 시민들이 모여들어 119에 신고하고 심폐소생술을 시행하는 사례도 많이 있습니다. 지하철뿐만 아니라 엘리베이터나 식당 등 도시의 여러 공공장소에서 누군가 도움이 필요한 시급한 상황이 발생하면, 시민적 무관심 모드를 해제하고 관심을 기울이게 됩니다. 즉, 시민적 무관심은 타인에 대한 관심을 종료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할 때 바로 개입할 수 있는 '관심 절전 모드'인 셈입니다.


image01.png 시민적 무관심이 시민적 관심으로 바뀌는 순간 (지하철 안 심폐소생술 상황)


불편한 접촉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지하철을 타는 중에도 그 불편함이 아무렇지 않은 듯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승객들. 그러나 곤경에 처한 사람을 보면 나 몰라라 하지 않는 승객들. 이런 장면을 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부대끼며 살아가는 우리 도시 속에서 알게 모르게 티 내지 않고 주위를 살피는 도시인의 섬세한 배려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지하철에서 스마트폰 보는 사람들>이 삭막해 보인다고 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시선은 스마트폰에 있지만, 마음의 눈은 타인을 향해 열려 있다는 점은 틀림없습니다. 이런 지하철 안의 풍경은 수없이 많은 타인을 마주칠 수밖에 없는 도시에서 익명성을 존중하는 동시에 공동체성을 단절하지 않는 우리 사회의 절묘한 지혜를 '시선회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런 연결과 단절 사이의 미묘한 균형 덕분에 매일매일 우리는 지옥철로 불리는 불편한 공간에서도 묵묵히 공존을 이어나갈 수 있는 게 아닐까요? 지금까지 <지하철에서 스마트폰 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도슨트의 인문사회학 노트1: 시민적 무관심(civil inattention)


"시민적 무관심의 핵심은 상대방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시각적으로 인지시키고(즉, 그를 보았음을 인정하는 것), 곧이어 관심을 거둠으로써, 상대가 특별한 호기심이나 의도의 대상이 아님을 표현하는 데 있다."

- 어빙 고프만, 《공공장소에서의 행동》, 1963 -


미국의 사회학자 어빙 고프먼은 우리가 매일같이 주고받는 눈짓과 몸짓, 언어와 상징의 교환 속에서 사회가 구성된다고 본 대표적인 상징적 상호작용론자다. 그가 말한 시민적 무관심은 수많은 타인들이 교차하는 도시의 일상에서 갈등을 피하고 질서를 지켜내는 보이지 않는 ‘도시의 예절’이다.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곧 시선을 거두어 과도한 관심이나 간섭을 피하는 시민적 무관심은 단순한 무심함이 아니라, 도시에서 연결과 단절 사이의 미묘한 균형을 이루며 서로의 사생활을 존중하는 방식이다. 고프먼은 이를 통해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가 제도나 법 이상으로, 사람들 사이의 작은 몸짓과 섬세한 상호작용이 차곡차곡 쌓여 형성된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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