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과소비를 한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과소비와는 거리가 한참 멀다고 생각했다. 몇 백 만원짜리 비싼 명품을 산적도 없었고, 마이너스 카드를 긁으며 수입을 뛰어넘는 소비를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알고리즘에 의해서 우연히 유튜브에서 ⌜환경스페셜 옷을 위한 지구는 없다⌟라는 다큐멘터리를 보게 되면서 소비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
물건이 아직 멀쩡해서 버리기엔 아깝고, 내가 쓰자니 유행이 너무 지났거나 질렸을 때 흔히 기부를 한다. 기부는 상당히 친사회적으로 여겨지는 행위이기 때문에 기부를 한 스스로에게 약간의 뿌듯함을 선사할 수 있고, 더불어 세액공제 또한 받을 수 있어서 연말정산을 할 때 어깨가 살짝 가벼워진다.
나 역시 이런 마음으로 기부를 했었다. 철마다 안 입는 옷들은 얼마나 많은지, 유행이 지났거나, 작아졌거나, 혹은 질린 옷들을 기부를 했었다. ‘
‘기부를 하다니 정말 뿌듯해, 이 물건은 버려지지 않을거야, 그렇지? 누군가에게는 요긴하게 쓰일거야. 버리지 않았으니 환경오염도 아니고, 세액공제까지 받다니 일석이조야’ 라고 약간의 자부심까지 느끼면서 말이다.
⌜환경스페셜 옷을 위한 지구는 없다⌟에서는 갈 곳 없는 물건들이 제 3세계에 쌓여서 소들이 풀 대신 옷을 뜯어먹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기부를 하면 어딘가에 있는 누군가가 나에게 쓸모없어진 물건을 대신 잘 써줄 것이라는 건 착각이며 한국은 버려지는 폐기 옷을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 수출만이 답인 것이다. 우리가 버린 옷은 바다를 건너 제 3세계에서 아주 큰 거대한 산이 되었다. 텍도 떼지 않은 옷들은 켜켜이 쌓여 거대한 무덤을 이루었다. 옷을 태우느라 만들어지는 미세먼지는 환경을 오염시킨다. 소들은 풀 대신 옷을 뜯어먹는다.
무엇이 문제일까? 우선은 생산과잉이 문제이다. 그러면 왜 생산과잉이 이루어지는가? 결국 그만큼 팔리기 때문이다.
충격적인 다큐멘터리 한 편을 보았다고 해서 나의 소비패턴이 하루아침에 바뀌지는 않았다. 당연했다. 오랜 시간 쌓아온 습관을 한순간에 바꾸는 것은 만화에서나 가능한 일이니까 말이다.
다만, 예전에는 옷을 구입할 때 ‘이 옷이 나에게 얼마나 잘 어울릴 것인가’ ‘이 옷을 입은 나는 얼마나 멋있어 보일 것인가’를 생각한다면, 다큐멘터리를보고 난 이후에는 ‘이 옷을 얼마나 오래 입을 수 있는가’ ‘이 옷이 꼭 필요한가?’ ‘이미 갖고 있는 다른 옷들로 대체할 수 없는가?’ ‘오래오래, 이 옷이 낡아서 더 이상 입을 수 없게 되었을 때까지 입고 싶은 옷인가?’를 스스로에게 묻는다.
저 4가지 질문을 던질 때 내 장바구니에 끝까지 남아있는 옷은 많지 않다. 유행을 타지 않는 스테디한 스타일의 옷, 대체될 수 없는 옷, 그리고 오래오래 옷의 수명이 다할 때까지 입고 싶은 옷은 예상외로 별로 없기 때문이다.
돈을 낭비하는 일이 없어졌다. 그리고 놀랍게도 저 질문들을 통과하여 내 장바구니에 끝까지 남아있는 옷들에게 애정이 샘솟게 되었다. 나와 오랜 시간 함께할 옷들, 옷으로서의 수명이 다해서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내가 간직할 옷들이라는 생각에서 일까? 옷장에 있는 옷들을 조금 더 귀하게 여기게 되었다.
오늘도 모 연예인이 홍보하는 운동화가 알고리즘에 떠서 클릭하는 웹사이트마다 똑같은 광고를 3번은 보았다.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구입하지 않았다. 그거 언제까지 쓸거니? 내년에도 쓸거니? 후년에도 쓸거니? 수명이 다할 때까지 써줄거니? 라는 질문에 ‘아니’라는 답이 나왔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