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자씨 전기장판 아래에는 낡은 통장이 있다. 그 통장엔 막자씨가 어린 시절부터 모아놓은 돈이 있다. 옆 집 빨래를 대신 해주고 받은 돈 몇 푼, 앞 집 아이를 봐주고 얻은 돈 몇 푼, 밤을 새워 인형 백 개에 눈알 이 백 개를 붙이고 받은 돈 조금…. 막자씨 통장에 있는 돈은 모두 그런 돈들이다.
막자씨는 집안의 막내딸이었다. 막자씨 어머니에게는 이미 딸 셋이 있었는데, 아들을 낳기 위해 임신을 했다고 한다. 기대와는 다르게 딸이 나오자, 아이에게 마지막 계집이라는 뜻으로 막자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젖도 물리지 않은 채 구들장에 내팽개쳐놓았다고 한다. 막자씨의 인생은 고되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집은 가난했고, 먹을 것은 없었으며, 아버지는 몸이 아팠고, 자매들은 모두 어렸다. 막자씨는 여덟 살이 되던 해부터 잡다한 일을 했다. 아버지의 강요로 옆 동네 잘 사는 집에 애기식모로 취직을 했다가 일을 제대로 못한다고 쫓겨난 이후 돈이 되는 잡다한 일을 도맡아 했다고 한다.
뜨거운 물이 나오지 않아 찬 물에 벌겋게 부르튼 손으로 성인 스무명 분의 빨래를 끝까지 해냈다는 이야기나, 아이가 옷에 오줌을 싸도 갈아입을 내의가 없어 오줌 젖은 내의를 그대로 입고 아이를 봤다는 이야기나, 모두가 잠든 늦은 밤, 불을 킬 수가 없어서 작은 초를 켜고 인형 눈알을 붙여서 다음 날 아침이면 눈앞이 안개가 낀 것처럼 뿌옇더라는 이야기는 막자씨가 종종 손주들에게 들려주는 영웅담이자 신세한탄이었다.
미혼인 시절에도 풍족함이라고는 없었던 막자씨의 삶은 결혼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남편이 벌어다주는 수입은 일정하지 않아 항상 전전긍긍해야했다. 전쟁통에도 아이는 생기듯 가난함 속에서도 아이는 생겼다. 먹여 살려야 할 세 아이가 생겼다. 막자씨는 연년생인 첫 째와 둘째를 옆구리에 끼고, 막내를 등에 업고 삯바느질을 해야 했다. 그래도 먹고 살기가 팍팍했다. 아이들은 늘 배가 고프다며 울었다. 김치와 보리쌀 한 줌, 그리고 물을 한 가득 넣어서 한 시간을 끓이면 김치죽이 완성되었다. 그렇게 완성된 김치죽을 다섯 식구가 조금씩 나눠먹었다. 아이들은 가장 맛있는 음식이 김치죽이라고 했다. 막자씨는 그것이 늘 마음이 아팠다. 막자씨 입에 들어가는 음식은 거의 없었다. 이상하게 배가 부르다는 말을 막자씨는 참 자주했다. 그러면 아이들은 바닥에 엉겨 붙은 김치죽까지 숟가락으로 박박 긁어먹었다.
“다음엔 더 좋은 걸 해줄게.”
막자씨는 아이들에게 늘 지키지 못할 약속을 했다.
막자씨의 가난은 막자씨 엉덩이에 꼬리처럼 붙어서 쉽게 끊어지질 않았다. 막자씨는 하도 오랜 시간 가난과 함께하다보니 가난이 나중에는 식구처럼 느껴졌다. 김치죽을 둘러싸고 앉아있는 식구들 틈에 가난도 같이 앉아있는 것 같았다고 한다.
남편이 실직을 했다. 남편의 실직 후 가난은 덩치가 더 커졌다. 못 먹어서 바짝 마른 다섯 식구 사이에서 유일하게 가난만 덩치가 비대했다.
막자씨는 돈이 되는 일이면 무엇이든 했다.
가난의 비대한 덩치에 깔려죽지 않으려고 막자씨는 아침, 저녁 할 것 없이 일을 했다. 낮에는 앞 집 가게 일을 도와주고, 저녁에는 동네 어귀의 집을 돌아가며 찹쌀떡을 팔았다.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밤에는 삯바느질을 했다. 막자씨는 자신의 몸이 찰흙 같다고 생각했다. 물기 없이 퍼석퍼석 말라 툭 치면 부스러지는 찰흙 말이다. 그래도 막자씨는 저축을 멈추지 않았다. 천 원을 벌면 백 원을, 백 원을 벌면 십 원을 저축했다. 막자씨의 통장은 모두 그런 돈으로 가득하다. 막자씨의 시력과, 관절과, 젊음과 바꾸기엔 너무나 작은 돈들이었다.
막자씨는 작은 소망이 있었다. 본인이 죽기 전 유산으로 몇 푼이라도 자식들에게 물려주고 싶다는 작은 소망이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많이 모았지.”
막자씨는 때때로 전기장판 아래에서 통장을 찾아서 들여다보았다. 막자씨 입가에 미소가 걸릴 때면 막자씨의 자식들은 그 통장이 얼마나 막자씨의 마음을 따듯하게 해주는 지 알 수 있었다. 막자씨는 통장의 금액을 불리고 불리면 언젠간 집 한 채 정도는 사줄 수 있지 않을까 소망했다.
막자씨의 자식들은 알았다. 그 금액으로는 집은커녕 차 하나도 살 수 없다는 것을. 하지만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다. 막자씨의 통장은 그깟 집에 비교할 수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