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ADHD입니다”라는 말이 왜 따뜻하지 않았는가
“나는 ADHD야.”
그 말은 설명처럼 들렸다.
그리고 동시에 면책처럼 들렸다.
나는 놀랐다.
그가 자신을 드러냈다는 것보다
그 말 하나로
모든 관계의 책임을 벗어났다는 사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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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은 고백이 아니었다.
이해를 구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건 일종의 선언이었다.
> “나는 이러니까,
내가 한 말과 행동에 대해 설명할 필요 없어.”
“넌 이해해야 하고,
난 굳이 바뀌지 않아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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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은 관계를 여는 말이어야 한다.
하지만 그 고백은
관계를 닫는 말이었다.
그 말 이후부터
그 사람은 어떤 피드백도 듣지 않았고,
어떤 조율도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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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그는 진심을 보여준 게 아니라,
진단을 꺼내 방패를 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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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니어그램 3번 유형,
그들은 감정 대신 이미지로 살아간다.
그 이미지가 ‘이해받고 싶은 사람’일지라도
실제로는
이해받는 걸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해를 강요받지 않는 위치에 있고 싶다.
‘이런 내가 멋지다’고 여겨지길 원하지,
‘이런 내가 바뀌어야 한다’는 말을
단 한 번도 원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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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진단은,
고백이 아니라 장치가 된다.
관계를 유리한 위치에서 조율하기 위한 도구.
슬프게도,
그 말은 더 이상 상처가 아니다.
그 말은 전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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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을 들은 당신이
왜 위로받지 못했는지,
왜 거리를 두고 싶어졌는지,
왜 혼란을 느꼈는지.
> 그건 당신이 느꼈기 때문이다.
그 고백이 ‘정서’가 아니라
‘면책문장’이었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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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고백은 책임을 감당하려는 마음이다.
하지만 이 고백은
책임을 피하기 위한 무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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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자꾸 말한다.
“요즘은 모두가 자신의 진단을 드러내는 시대야.”
하지만 내가 본 건 그게 아니다.
> 요즘은 모두가
자기 병을 자기 무기로 쓰는 시대다.
그리고 어떤 고백은
너를 감싸는 게 아니라,
너를 조용히 조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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