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낯섦(2014), 오르한 파묵

by 봄눈

모든 것을 보지만 보이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모든 것을 듣지만 아무것도 듣지 않은 척해야 한다. 하루에 열 시간을 걸어야 하지만 전혀 걷지 않은 것처럼 느껴야 한다. p.91


어린 시절에 창밖으로 밤마다 들리던 ‘메미일~묵, 찹쌀떡’ 소리를 떠올리며 책을 읽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의 그 옛날 찹쌀떡 장수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이 있을까하는 궁금함이 일었다. '보자'라는 것이 터키에서 밤거리를 돌아다니면서 파는 음료인가 보다. 이 소설은 '보자' 장수의 일대기이다. 단지 보자 장수의 인생 이야기이기만 하다면 아쉬울 것 같고, 책의 제목에 나오듯이 그의 인생에서 ‘낯섦’이라는 것이 무엇일지 너무나 궁금해하면서 읽었다. 착하고 어린아이 같은 심성의 보자 장수 메블루트가 느끼는 ‘낯섦’이라는 것이 그의 인생에서 어떻게 느껴질지 잘 묘사되어 있었으면 정말 좋겠었는데, 책을 다 읽고 난 지금, 가끔 모호하게 등장하는 '낯섦'이라는 것이 소설의 스토리에서 별다른 역할을 한 것 같지는 않아서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옛날이야기처럼 순수하고 무한한 이 밤에 터키인이라고 느끼는 것은 가난하다고 느끼는 것보다 훨씬 더 기분이 좋았다. p.146

다만 그들이 보고 있는 상황에서 주먹을 쥐고 구호를 외치는 것이 이상하고 인위적으로 느껴졌다. 과한 정치 행위에는 인위적인 무언가가 있었다. p.148

화제나 지진이 일어난 후 재앙의 날 같은 분위기였고 메블루트는 이러한 분위기가 마음에 드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p.150

더 이상 누구도 메블루트에게 언제 고등학교를 마칠지 묻지 않았다. p.161

나 같은 불구를 질투해 뒷담화를 하는 이유는 내가 목이 굽었는데도 딸들과 행복하게 지내고, 삶의 희열을 맛보며 술에 취할 줄 아는 행복한 사람이라서이다. p.164

집에서 메블루트의 순진한 표정을 보고는 분노의 절반이 사라지고 말았다. p.197

2년 가까운 군복무 기간에 메블루트는 지방도시, 군대, 다른 남자들과 사람들 사이에서 이목을 끌지 않고 사는 법에 대해 얼마나 많이 배웠던지 군대에 가기 전에는 인간이 되지 않는다는 말에 공감했다. p.209

한 명에게 공짜로 주면 다음날 누구에게도 팔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p.257


책 속에서 그 시대 가장 평범한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엿볼 수 있다. 그 사고방식이 우리와 몹시 비슷해서, 우리 자신을 멀리서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파묵은 가난한 사람들의 마음을 생생하게 그려내는 데는 성공하지 못한 것 같다. 가난 때문에 불가항력적으로 생기는 질투, 분노, 격분을 하나도 그려 내지 못한 듯하다.


하지만 파묵은 자기 자신을 메블루트와 동일시하면서 등장 인물에 대한 따뜻한 마음을 보여 주기는 했다.


밤마다 수 킬로미터를 걷는 동안 온갖 아름다운 그림들과 낯선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p.274

제가 잘못을 많이 했습니다. 사미하에게 으스대고 친구가 되어 주지 못했지요. 하지만 사미하도 제게 가시 돋친 말을 많이 했습니다. p.290

창밖으로 도시를 내다볼 때마다 사미하가 어디로 도망쳤는지 어떤 사람들과 함께 있는지 상상했다. 브라보 사미하, 도망치길 잘했어. p.294

더군다나 세상을 살면서 생기는 고민들은 모두 낯선 마음이 불러온 망상일 뿐이다. p.310

'얌전한 애는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스스로 생각하는 애는 얌전하지 않아요.'라고 나는 말하지 않았다. p.339

하지만 다음날 아침에 딸들이 마당에서 노는 동안에 나와 함께 도망치던 날 밤 악셰히르 기차역에서 나를 쳐다보던 메블루트의 시선이 머릿속에 떠올라 다시 불안해졌다. p.361

메블루트는 라이하한테 써 달라고 했어. 나에게 라이하와 사랑에 빠졌다고 장황하게 얘기했는걸. p.374

라이하가 집에 있었더라면 그의 걱정을 덜어 줄 적당한 말을 찾았을 것이다. 이에 반해 사미하는 뭔가에 꽂히면 자신이 원하는 것 만을 보았고, 그래서 메블루트를 더욱 다급하게 만들었다. p.605


한참 읽다 보니 새로운 내용이 없어서 이야기가 진부하게 느껴진다. 오르한 파묵이 늙었다. 늙어서 낭만적이 되었다. 늙어서 낭만적이 된다는 것은 어린애 같아진다는 것이다. 어린애 같아진다는 것은 상대를 생각하지 못하고 자신만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메블루트에게 타자인 여성은 모두 타자화 되었다. 여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나이 들어서까지 이어지는 등장 인물들의 편지 공방은 파묵의 옛날식 사고방식으로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내가 파묵의 위대함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그 당시 터키가 얼마나 여성을 하대하는 시대였나를 알아야겠다. 요즘의 시선으로 이 책을 받아들이면 안 된다.

터키 음료 '보자'

보자가 조상들의 음료라는 점을 이해하는 것으로 충분해. p.308

첨가물을 넣은 요구르트를 파는 이 저질들이 거리 요구르트 장수들의 장사를 끝장내버렸어. p.354

하지만 이스탄불의 오래된 건물에서도 자신이 여전히 도시의 이방인임을 상기했다. p.359

그 사람네 건설현장에서 조장이 되면 1년 동안 장사해서 번 돈을 한 달 만에 벌걸세. p.386

선지자 에펜디는 모든 사람들이 알다시피 메블루트는 예언자의 탄생을 축하하는 긴 시를 의미한다고 말했다. p.393

그는 왜 밤마다 변두리 마을의 한적한 묘지로 들어가 달빛을 받으며 사이프러스 나무들 사이에 앉아 있고 싶을까. p.418

걸으면 상상력이 가동하고 메블루트에게 이 세상에, 사원 벽 뒤에 무너져가는 목조 가옥들의 묘지들 안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었다. p.436

웨디하 언니는 모든 걸 다 이해하는 것 같지만 사람이 왜 홀로 서야 하는지는 모르는 게 분명하다. p.509

밤에 도시를 배회하는 것은 메블루트에게 자기 머릿속을 배회하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p.629

그런데 앞으로 사미하와 살아갈 많은 세월이 남았음에도 젊어서는 전혀 생각도 못한, 삶을 헛되이 살았다는 두려움이 그의 영혼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p.632

당신이 보자를 팔아서 얼마나 반가운지 몰라요. 다행히도 누가 보자를 사겠어라고 생각하지 않았네요. p.634


어쨌든 파묵은 소설의 대상을 여전히 사랑한다. 이 소설은 이스탄불이라는 도시가 그 대상이다. 그 도시의 역사와 변화를 소설가는 하나도 놓치지 않고 기록하고 싶어 한다. 그 역사와 변화가 소설의 줄거리와 연관이 있건없건 간에 그 시대 사람들의 생활사를 모조리 기록해 놓고 싶어 한다. 소설이 아니라 생활사 박물관 같은 느낌이다. 평안하고 인정받는 삶을 살았던 노벨문학상 작가의 열심한 노력이 엿보인다. 지난 수십 년 동안의 이스탄불 발전 과정은 서울의 발전 과정과 비슷했을 것 같다. 이렇게 긴 세월 동안의 서울의 발전을 그린 소설이, 그것도 애정을 담아서 그린 소설이 있으면 나쁠 것 같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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