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서울의 상징
서울의 상징물은 무엇일까? 생각나는 것은 많은데, 쉽게 한 가지를 정하기 어렵다. 워낙 다양해서 그 ‘다양성’이 ‘서울의 상징‘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서울은 25개 자치구에 1,0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살고 있고, 권역별로 서로 다른 생활권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저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다. 서울을 20여 개 전철 노선과 BRT로 수도권 도시들을 촘촘하게 이어진 2,000만 인구의 서울 광역생활권으로 본다면 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거대하고 다양한 서울의 상징물을 하나만 꼽자면 무엇일까? 높은 건물로는 N서울타워나 63 빌딩 그리고 제2 롯데월드 정도가 떠오른다. 문화적 상징물은 세종문화회관이나 예술의 전당이 손꼽히면 좋겠지만, 싸이의 노래 ‘강남스타일’ 동상이 있는 강남역 그리고 홍대나 이태원 같은 역동적인 상업거리가 떠오른다. 자연물로는 북한산이나 남산 그리고 한강도 매력적이고 경쟁력 있는 후보다. 역사적으로는 숭례문을 포함한 한양도성도 유력하다. 후보가 넘쳐서 쉽게 결론이 나지 않겠다.
개인적인 의견은 객관성에 한계가 있으니 통계자료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방문한 곳을 찾아보면 어떨까? 한국문화관광연구원이 매년 발표하는 전국의 주요 관광지점 입장객 통계의 최근 자료를 살펴보면, 경복궁의 연간 방문객(입장객) 수가 450만 명 정도로 서울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찾았던 곳이다. 이 중에는 외국인도 100만 명이나 포함되어 있으니, 내외국인 모두 즐겨 찾는 곳이라 할 수 있겠다. 전국 순위도 확인이 가능한데, 용인에 있는 에버랜드(약 600만 명/년) 다음으로 경복궁이 전국 2위의 입장객을 유지했다. 명실상부 대한민국과 서울을 대표하고, 서울시민이 가장 사랑하는 곳이라 할 수 있겠다. 게다가 경복궁은 서울의 역사와 600년 정도 함께했다. 조선시기부터 육조거리로 정치적 상징성이 컸던 경복궁의 전면 공간은 대한민국 국가 상징가로의 시작으로 서울의 도시구조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월드컵 거리응원부터 시작해서 다양하고 중요한 사건들의 무대였다. 연간 150여 개 크고 작은 행사까지 꾸준히 열리는 곳이니 객관적으로도 경복궁과 국가상징가로 인 세종대로는 서울을 대표하는 상징공간임을 부정하기 어렵겠다. 이런 의미 있는 장소에서 600여 년간 구심점 역할을 해왔던 건축물이 있다. 때론 폐허가 되기도 했지만, 수차례 재축된 경복궁의 정문, 바로 광화문이다.
전쟁 그리고 폭격
지금의 광화문은 서울에서 가장 많은 입장객이 찾는 경복궁의 정문이기도 하고, 국가상징가로의 중요한 건축물로서 화려하게 단장하고 사랑받고 있다. 하지만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니다. 대한민국은 불행히도 시작하면서 광화문을 잃었다. 광복 후 5년 만인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남과 북 양측이 점령과 수복을 반복하는 과정에서 서울은 치열한 전쟁터가 되었다. 광화문도 전쟁을 피하지 못하고 그만 폭격에 불탄 것이다. 기단부의 석재는 남았지만 검게 그을렸고, 목조였던 부분은 완전히 사라졌다. 이렇게 대한민국은 시작과 함께 광화문을 잃는다. 광화문이 재축된 것은 약 20년 뒤인 1968년이다. 정치적으로 상징적인 전통 건축물을 복원함으로써 정통성과 사회 발전을 홍보할 수 있었고, 철근콘크리트를 재료로 사용하여 산업화된 국가 이미지도 부각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시에도 목구조가 아닌 철근콘크리트 구조로 재현하는 것을 아쉬워하는 목소리가 있었지만 큰 반대 없이 철근콘크리트로 지어졌다. 당시 아시아의 많은 나라들이 자국의 목조건축을 철근콘크리트로 재현하거나 재축하는 경향이 많았으니 한편으로 이해는 된다.
콘크리트?
기본적으로 철근콘크리트라는 재료는 거푸집에 타설 하는 공법으로 목구조와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그래서 목조건축물을 철근콘크리트로 재현하려면 콘크리트 타설이 용이하도록 거푸집을 만들 수 있는 형상이어야 한다. 일본의 오사카성도 철근콘크리트조로 만들어졌는데, 목구조의 섬세함이 눈에 띄지는 않는다. 어느 정도 재료의 물성과 형상의 섬세함 사이의 절충점을 찾았을 것이다. 그런데 광화문은 달랐다. 철근콘크리트로 만들어졌지만 단청무늬까지 칠하고 나니 만져보기 전에는 철근콘크리트로 만들어졌는지 알아채기 어려울 정도로 재현이 뛰어났다. 이런 점은 거푸집을 만들어낸 목수들의 섬세한 솜씨 덕분이었을 것이다. 철근콘크리트 광화문도 목수의 손에서 완성될 수 있었다는 것이 아이러니할 뿐이다.
‘1천 년도 까딱없게 만들었다’는 당시 현장소장의 인터뷰 기사 내용이 눈에 띈다. 그런데 1천 년을 장담하던 철근콘크리트의 내구성에도 이 광화문은 40년을 못 넘기고 철거되고 만다. 위치와 방향이 잘 못된 기존 철근콘크리트 광화문을 철거하고, 본래의 위치에 본래의 방향으로 복원하는 복원계획을 문화재청이 수립한 것이다. 철근콘크리트 광화문을 2006년에 철거하면서 절단한 일부 부재를 서울역사박물관으로 옮겼고, 야외에 전시하고 있어 지금도 쉽게 볼 수 있다. 철거 당시 모습 그대로 단청이 칠해진 철근콘크리트 광화문의 부재는 다시 봐도 콘크리트를 타설을 위한 거푸집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목수의 솜씨가 놀랍기만 하다.
철거 후 발굴조사와 고증을 거쳐 복원 설계를 했고, 전통 목구조 방식으로 개축되어 2010년에 준공되었다. 우리가 지금 마주하고 있는 광화문은 이때 재축한 것이다. 38년 만에 다시 지어진 이 광화문은 이제 10년이 지났다. 대한민국 시기에 전쟁과 복원 그리고 철거와 재축까지 다사다난했던 광화문은 조선의 건축물이었다. 그렇다면 조선시대의 광화문은 어땠을까?
조선의 광화문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당시 고려의 남경이 있던 양주지역에 새로운 수도로 정하고 성과 궁을 짓도록 한다. 태조는 이 일을 고려 말과 조선 초기에 환관이었던 김사행에게 이 일을 맡겼다. 김사행은 원나라(몽골)에 환관으로 보내졌다가 중국에서 건축에 대한 견문을 넓히고 고려 말에 돌아온 인물인데, 지금과 비교하자면 유학을 다녀온 것과 비슷할 것이다. 김사행은 왕명으로 단기간에 한양도성과 경복궁을 완성했지만, 곧 하자가 생겼다. 짧은 공사기간은 예나 지금이나 문제가 되는가 보다. 불과 몇십 년 뒤 세종대에 이르러 경복궁의 크고 작은 전각들이 기울기 시작한다. 세종은 대대적인 보수를 지시했고, 그때까지 마땅히 이름이 없었던 건물들의 이름을 지어 올리라고 집현전에 명한다. 광화문을 비롯해 영추문, 신무문, 건춘문 등이 이때 이름이 지어지고 현판이 걸렸다. 경복궁 홈페이지에는 세종 13년에 광화문을 다시 고쳐지었다고 설명하고 있고, 문종실록에는 세종대에 광화문이 기울어 기초공사를 다시 했다는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 부동침하가 발생한 건물을 고쳐지었다면, 전면 해체한 뒤 기초를 다시 보강해야 한다. 세종대의 보수는 신축한 지 40년도 안 되었던 광화문을 전면 해체 후 지반보강을 한 개축공사로 추측해 볼 수 있겠다.
조선시대에도 광화문은 전쟁을 피하지 못했다.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으로 불타서 소실되고 광화문과 경복궁은 오래도록 복원되지 못했다. 300여 년간 폐허로 남아있던 광화문은 19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고종을 조선의 26대 왕으로 만든 흥선 대원군에 의해 경복궁과 함께 새로 지어진다. 1867년 일이다. 19세기에서 20세기 초까지 빛바랜 흑백사진 속 경복궁은 이때 만들어진 세 번째 광화문이다. 지금의 광화문도 이 광화문을 복원 시점으로 삼았다.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복원 노력이나 고종의 대한제국 선포도 1910년 경술국치를 막지 못했다. 조선에 대한 지배를 확고히 한 일제는 경복궁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짓고, 완공과 함께 광화문을 해체한다. 없어질 운명이었지만, 우여곡절 끝에 경복궁 동측 건춘문 위쪽으로 지금의 국립 민속박물관 입구가 있는 곳으로 옮겨진다. 불행 중 다행이다. 일제에 의해 이전되어 초라하게 명맥을 유지하던 광화문은 광복 후 주권을 되찾았지만 본래 자리로 돌아오지 못하고 그곳에서 한국전쟁의 폭격을 맞게 된다.
광화문은 최소한 네 번 다시 지어졌다. 조선시대에도 두 번의 재축 기록이 확인되고, 일제강점기 한 번의 이전이 있었다. 그 후 대한민국 시기에 또 다른 두 번의 재축이 있었다. 광화문은 조선의 건국과 함께 한양의 중심 건물이자 조선왕조를 상징하는 건축물이었지만, 지금은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의 상징적 건축물이 되었다. 두 번은 전쟁으로 불타고, 복원의 시행착오도 거치면서 어렵게 어렵게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힘든 역사를 우리와 함께한 광화문이 역경을 딛고 부활한 것처럼 앞으로도 한결같은 모습으로 서울의 상징이 되어 주었으면 한다. 서울과 함께하는 광화문의 불멸을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