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시간이 늘어진 테이프처럼 말도 못하고 느려져 이상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시간은 상대적이라던 오래된 과학자의 말처럼. 바쁜 무리 속 그 사람만 천천히 내게 걸어오는 것처럼. 난 원래 첫눈에 반한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 철없던 시절에 그저 생각 없이 나가는 말과 행동처럼 이성적이지 못한 말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난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닌데라는 말로 시작해 너에게 반했다고 끝나는 고백만큼이나 바보 같은 말은 없다 생각했다.
그러나, 난 첫눈에 반해버렸다. 이미 몇 년이나 지난 일이라 그 사람과 무엇을 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를 처음 보았던 순간은 여전히 또렷하다. 난 그 사람을 친한 선배와의 술자리에서 만났다. 당시 인스턴트 연애와 참을 수 없이 가벼운 감정에 신물이 나서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던 그때, 난 그에게 첫눈에 반했다.
어두운 술집 통로를 너무 느린 걸음으로 걸어오던 그 사람, 너무 느려서 흔들거리던 그의 속눈썹의 개수까지 셀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다지 미남이지도 몸이 좋지 않았지만 알 수 없는 감정에 매료되어 그에게 눈을 뗄 수 없었다. 그에게 반해 상기된 얼굴을 감추려 연거푸 술잔만 들이켰다. 이내 전화번호를 교환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그의 이름을 자판에 눌렀다 지웠다 하면서 처음 놀이공원에 간 아이처럼 두려움과 설렘이 뒤섞여 불안한 상태였다.
연락을 할까 말까 하다 그에게 노을이 예쁘다며 한강에서 만나자고 연락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뻔뻔했었다. 한강 공원으로부터 1시간 반이나 떨어져 살고 있는 그 사람을 일방적으로 불러냈으니 말이다. 그는 첫 만남의 그 느린 걸음으로 빨리 오려 뛰어와 인사를 건넸다. 우린 그로부터 몇 번 더 만났지만 이렇다 할 결과를 내지 못하고 헤어졌다.
가끔 그 느린 걸음, 흰 티셔츠, 풍성한 머리칼을 생각해본다. 그 사람은 알까, 자신이 누군가에 마음을 졸이게 하고, 고민하게 했는지. 어디서라도 건강하고 잘 지냈으면 좋겠다. 내가 죽을 때까지 느끼지 못할 수도 있던 그 한눈에 반했다는 감정을 불러일으켰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