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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지령 Jul 10. 2023

첫사랑을 시작한 너에게

이별태도

* 아이가 20살 성인이 되어 첫사랑을 시작하게 되면 해주고 싶은 말을  미리 편지글로 써봤습니다.


첫사랑을 시작한 너에게


안녕. 보름. 어제가 경칩이었어. 너도 알다시피 엄마는 달력에 표시된 절기 보는 것을 좋아해. 절기 말이야, 그게 진짜 신기하게 잘 맞거든. 엄마는 가끔 절기와 자연의 이치가 얼마나 잘 맞는지 감탄한단다. 아직 나무는 싹 하나 틔우지 못한 앙상한 가지를 가진 겨울나무와 다름없이 초라한데 바람이 겨울바람과는 달라. 살랑살랑 부는 바람은 한결 부드러워졌거든. 개구리가 겨울잠에서 깨어나 운다 해서 경칩이라는 말은 또 얼마나 재미있니. 단어 속의 의미를 알게 되면 단어에 대한 감정이 생기거든. 어쩐지 경칩이라는 말속에 봄의 활력처럼 경쾌함이 느껴지지 않아? 엄마는 경칩만 지나면 창문을 열고 대청소를 하고 싶어 져. 묵은 겨울 먼지를 털어내고 봄바람과 봄햇살을 집안으로 들여놓으면 마음까지 다시 새것이 되는 기분이 들거든.


엄마가 오늘 너에게 편지를 쓰는 이유는 너의 첫사랑을 축하해 주기 위해서야. 그리고 이별에 대해서도 말해주고 싶어. 사귄 지 얼마나 됐다고 재를 뿌리냐고? 설마 엄마가 아들의 사랑에 응원을 하면 했지. 재를 뿌리겠어? 엄마는 사랑과 이별을 모두 경험해 봤으니까 자식걱정에서 나온 조언이라고 생각해 줘. 그리고 엄마의 첫사랑 이야기도 들려주고 싶어서지. 아빠한테도 한 번도 말하지 못한 이야기니 우리만의 비밀이라는 건 알아두고!!


윤종신의 노래 <오래전 그날>의 <교복을 벗고 처음으로 만났던 너…>라는 가사처럼 엄마는 스무 살에 첫사랑을 했어. 그 친구도 윤 씨였으니 Y라고 호칭할게. Y는 엄마랑 같은 학원에서 공부하는 친구였어. Y는 엄마에게 굉장히 적극적으로 호감을 표현했어. 엄마는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적극성에 당황하기도 하고, 조금은 무섭기도 했어. 어떤 사람인지 모르니까… 근데 하루가 지나고 다음날이 돼도 엄마에게 호감을 표현하는 거야. 한 달이 지나도록 Y의 호감표현은 계속되었단다. 엄마도 그 친구의 적극성에 점점 마음이 열리더라. 정식으로 사귀자고 고백을 받던 날의 기분이 아직도 기억나. 그 기분은 살면서 처음 느껴보는 것이었어. 엄마는 굉장히 좋은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 누구에게라도 친절하고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

Y와 엄마는 그렇게 연인이 되었고, 도서관도 같이 다니고, 같이 공부도 하고, 서로 좋아하는 음악을 공유하고, 극장도 가고, 풋풋한 연애를 했지.


근데 Y는 언제부터인가 엄마가 전화해도 전화를 잘 받지 않고, 말투도 차가워졌어. Y는 엄마와 연애한 지 2년 정도 지나면서 마음이 변했던 거야. 이별을 명확하게 말하지 않고, 전화를 받지 않는 행동으로 엄마를 계속 회피하고 있었어. 엄마는 Y한테 화가 나면서도 선뜻 헤어지자는 말을 먼저 못 했단다. 나중에는 엄마가 더 좋아하고 있었던 것 같아. 그러던 어느 날 통화가 되었는데 엄마에게 3개월의 시간을 갖자고 하더라. 엄마는 통화하는 내내 바보처럼 울어버렸단다. 너무 마음이 아팠어. 서로 좋아했던 시간들이 그저 살면서 지나가는 바람 같은 것이었다고 생각하니 슬프더라.


 엄마는 3개월의 시간을 갖자는 게 희망고문처럼 애매한 이별이라고 생각했어. 그렇지만 엄마도  '진짜' 헤어질 결심을 못하고 있었을 때 공지영 작가의 글을 마주쳤단다. 공지영작가는 딸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있었어.

“ 잘 헤어질 수 있는 남자를 만나라. 어떤 사람을 만나거든 잘 살펴봐. 그가 헤어질 때 정말 좋게 헤어질 사람인지를 말이야. 헤어짐을 예의 바르고 아쉽게 만들고 영원히 좋은 사람으로 기억나며 그 사람을 알았던 것이 내 인생에 분명 하나의 행운이었다고 생각될 그런 사람.”

엄마는 이 글을 읽고 ‘진짜’ 헤어질 결심을 했단다. 


바로 Y에게 메일을 썼어. 3개월의 시간을 갖자는 전화를 받은 지 1주일이 지난 시간이었단다. 메일의 제목은 <확실하게 헤어지는 게 서로에게 좋을 것 같아서> 였어. 엄마는 정말 쿨하게 이별을 말했지.  네가 나에게 고백해 주던 시간들, 함께 공부하면서 힘이 되고 위로가 되었던 시간들, 고마웠다고. 앞으로 서로의 미래를 응원해 주자고. 우리 각자 자리에서 멋진 사람이 되자고. 고백하자면 쿨했던 게 아니라 쿨한 척을 했던 거야. 쿨한 이별은 어디에도 없거든.

그랬더니 답장 메일이 왔더라. 엄마가 기억하는 건 이런 내용이야.

“ 앞으로 나 살면서 너보다 좋은 사람 못 만날 거라는 거 알고 있어. 먼저 좋아한다고 해 놓고 먼저 식어버려서 미안해.  언젠가 한 번쯤 보고 싶어지면 연락해 주었으면 좋겠다…. 안녕…”


그 답장메일을 받고, 엄마는 묵은 먼지를 털어낸 듯한 이상하게 슬프고도 후련한 뿌듯함을 느꼈어. 경칩을 지난 봄바람을 맞이하듯 마음이 새로워지는 것 같았어. 잘 헤어져 준 엄마가 이겼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그의 기억 속에 한 번쯤 보고 싶어지는 사람으로 남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


그렇게 이별의 종지부를 찍고 엄마는 이별음악을 일부러 찾아 들으며 울고 싶을 때 울면서 슬픈 감정을 게워 냈던 것 같아. 그러면서도 더 열심히 내할일을  하고, 마음이 더 성숙한 사람이 됐어. 시간이 지나니 미움도 사라지고, 나의 한때를 곁에서 나눠준 사람으로서 진심으로 Y의 행복을 바라게 됐거든. 이별은 사람을 슬프게도 하지만 건강한 이별은 사람을 성숙시키고 성장시키더라. 그래서 사랑하는 것만큼이나 잘 헤어지는 것도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되었지. 그 후로 한 번도 Y를 본 적은 없어. 이제는 그립지도, 아프지도 않아. 다만 엄마 인생의 첫사랑이라는 말에 기억될 이름정도로만 남았단다.


첫사랑과 이별은 성숙을 만들어내는 데에 그 의미가 있는 것 같아.  22살 그 이별은 엄마의 인생에서 정말 쓰리고 아픈 이별이었단다. 근데 그 이별을 겪고 깨달은 게 있어. 다시 볼 수 없는 이별이라 하더라도, 소중한 인연을 맺은 관계에서 이별 태도는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지. 사람은 언제든 다 지나가.. 사람은 어쩌면 기억으로 존재하는 거야.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좋은 모습으로 남는다는 건.. 한 사람의  평생 기억 속에   자리하는 거거든.


또 깨달은 것은  이별의 상처를 아물게 해주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또 다른 사랑이라는 것. 엄마는 아빠를 만나 사랑하고 나서야 지나간 사랑은 그저 지나간 사랑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됐으니까… 첫사랑의 이별은 너무 아파서 생채기가 나지만 그 생채기를 아물게 하는 또 다른 사랑이 온다는 것도 믿게 됐고.

 

보름아. 사랑과 이별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분리될 수 없는 것일지도 몰라. 너든, 상대방이든 어떤 이유에서건 네가 이별을 말할 때는 뺨을 맞을 각오를 해서라도, 너를 진심으로 사랑해 준 사람의 마음에 예의를 다해 이별을 말하고, 상대방이 이별을 말할 때도 잘 헤어져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꼭 해주고 싶었어. 그 사람의 기억 속에 영원히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도록 하는 건 이별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자세일 거야. 사랑은 둘이 동시에 느끼는 감정이기에 한쪽이 변해버리면 성립될 수 없는 감정이지만 둘이 동시에 느껴야 하기 때문에 기적 같은 감정이기도 해. 그러니 지금 이 순간, 진심을 다해 너의 그녀와 사랑하렴.



*  엄마의 그림책

이 책은 사라진 직업, 등대에서 생활했던 등대지기의 삶에 대하여 아름답고 아련하게 그린 그림책입니다.  등대지기 가족이 등대를 떠나면서 손 흔들어주는 모습, 등대가 있던 자리, 그 자리에서  떠나는 등대지기 가족을 바라보는 모습이  

"나도 고마웠어~" 하고 말하는 것 같았어요.

서로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며 떠나는 모습이

아름다운 이별의 모습이었어요.

수많은 만남 속에  함께했던 소중한 인연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가요? 나와의 인연이 그 사람의 머릿속에 평생에 걸쳐 존재한다면

적어도 서로가 함께 존재했던 시간에 고마워하는 이별의 모습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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