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때에 맞춰 세끼를 챙긴다는 루틴이 사람을 이렇게 피폐하게 할 수 있는 걸까? 이제 개학이 얼마 남지 않았다. 세끼의 굴레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겠다 싶어 벌써부터 머릿속엔 새가 날아다니고 노래가 흘러나온다.
아이가 학교에 가면, 내가 먹고 싶은 것을 사 먹고, 중고서점 가서 책구경 좀 하다가
아.아(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사 마시고 와야겠다는 계획을 세워두니, 벌써부터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오늘의 식사준비는 즐겁게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당근이 예고되어있으니, 오늘의 채찍쯤이야 견뎌보자는 거다.
개학식, 방학식 같은 학교일정이 있는 날이면 엄마들 사이에서 아이들이 점심을 먹고 오는지 아닌지는 항상 중요한 화두다. 복권의 당첨번호를 맞춰보듯 조마조마한 묘한 긴장감마저 든다. 그러다가 개학식 날 점심제공이라는 학교 알리미가 뜨면 정말 복권이라도 당첨된 듯 신나서 나도 모르게 “아싸!“ 하며, 40대 여자가 쓸 것 같지 않은 단어로 탄성이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그 한 끼가 뭐라고…NO! 한 끼가 뚝딱 완성되는 되는 것이 아님을 나는 엄마가 되고서야 알았다.
맞벌이를 하는 동생에게 방학은 회사일 하랴, 아이 챙기랴 더 챙겨야 할 일이 많은 힘든 나날이다. 그런 동생이 개학이 다가오자 “이제는 학교에서 점심은 주니까 한 짐 덜게 되겠지. 한 끼가 어찌나 감사한지. 그러고 보면 우리 학교 다닐 때 엄마가 매일 도시락 싸준 거 진짜 대단한 거야. 그치?”
대화는 우리를 타임머신이라도 태운 듯, 학창 시절로 데려다 놓았다.
나는 80년대생이다. 국민학교 세대이고, 도시락 세대다. 그 말은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에 다닐 때까지 한 번도 급식을 먹지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고등학교 3학년 때 학교에 급식실을 짓고 있었지만 급식을 경험하지 못하고 졸업하였다.
엄마는 우리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도시락을 6개나 싸야 했다. 야간자율학습이 있으니 점심, 저녁 두 끼의 도시락을 싸야 하는 것이었다. 나와 2살 터울인 오빠는 고3이었고, 우리는 고1이었다. 오빠 것 2개, 나와 동생것 2개씩. 도시락의 숫자를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6이라는 숫자에 담긴 의미가 세 아이의 점심, 저녁이라고 생각하니 거를 수도 없고, 귀찮다고 하나를 뺄수도 없는, 유연성도 안 통하는 무조건 6이어야 한다는 압박이 내려가지 않는 체증처럼 매일이 힘들었을 것이다.
엄마에게 도시락에 담긴 책임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엄마는 사 먹으라는 말도 한번 없이, 새벽 일찍 일어나 밥을 안치고, 반찬을 준비하고, 국을 끓였다. 반찬은 엄마가 직접 만든 것들로 3~4가지를 싸주었는데, 엄마는 항상 메인메뉴 1개, 부가반찬 2가지, 자른 김을 쿠킹포일에 싸서 넣어주곤 했었다. 김을 도시락 부가반찬으로 싸주다 보니 엄마는 돌김 한 장 한 장에 참기름을 발라 굽는 작업을 자주 했다. 시중에는 납작하게 포장된 도시락 김이 있었지만 가격에 비해 맛이 없었다. 도시락을 위한 재료준비는 엄마일상의 틈에, 구석에, 쉼도 없이 계속되고 있었지만 우리는 그것을 인식할 겨를도 없이 당연하게 생각했다.
우리의 도시락 반찬은 날마다 바뀌었다. 그렇다고 비싼 반찬을 싸주는 것은 아니었다. 자식 3명의 반찬을 싸주어야 했으니 엄마는 자신의 노동을 좀 더 들여서라도 가성비가 좋은 식재료를 선택했고, 도시락 반찬에 적합하기보다 집에서 먹는 음식을 덜어서 싸주는 느낌이기도 했는데 대표적인 메뉴가 '오징어 고추장 볶음' 같은 것이었다. 나는 그 반찬을 좋아했는데, '오징어 고추장 볶음'을 싸주면 나는 밥에 덜어 쓱싹쓱싹 비벼 먹었다. 간혹 비엔나소시지를 싸주기도 했지만 비엔나소시지나 한입 돈가스 같은 가공품은 엄마 입장에서는 가격대비 비싼 반찬이었던 것 같다.
사랑이 아니라면 설명할 수 없는 14년의 새벽 도시락. 희생 없이 당연한 건 없었다.
엄마의 도시락에 대한 책임의 무게는 오빠와 우리를 합쳐 14년 동안 계속되었다. 내 새끼 배곯으면 안 된다는 마음 하나로 아침의 단잠을 이겨내고매일같이 변함없던 그 “한결같음”은 사랑이 아니라면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깜빡 늦잠을 자면 안 된다. 아이의 점심을 굶길 수는 없는 노릇. 엄마도 때로는 아픈 날도 있었을 텐데 아파도, 도시락은 싸야 했으니 내가 먹었던 그 당연했던 도시락이 엄마의 아침 단잠을 깨우고, 식재료를 다듬고, 손질했던 시간이 엄마의 쉼을 빼앗은 채, 일상 틈틈이 있었다고 생각하면, 희생 없이 당연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 한 끼가 뭐라고, 울고 웃나 가 아닌, 지금의 나는 엄두도 못 낼 어마어마한 사랑이었다.
다시, 동생의 말.
“너 고등학교 때 내 친구 미희 알지? 걔는 매일 김치만 싸왔었어. 어쩜 그렇게 김치만 싸 오는지, 김치 아니면 참치캔 한가지였다니까. 심지어 집도 꽤 잘살았어. 그러고 보면 우리 엄마는 힘든 살림에도 참 도시락 반찬에 정성이었어.”
미희네 엄마가 반찬을 김치만 싸줬다고 미희를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하더라도 미희는 매번 김치뿐인 도시락 뚜껑을 열때마다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그런 생각을 하면 짠한 마음이 드는건 어쩔수가 없다.
다만, 우리 엄마는 도시락을 싸며 도시락을 먹는 우리를 상상했을 것이라는 것만은 알 것 같다. 따뜻한 밥과, 국으로 속을 든든하게 채워야 공부도 할수 있다는 엄마의 마음이 들리는 듯했다. 자식 낳아보니 그 마음만은 이제서야 알 것 같았다.
사랑은 말로 표현해야 안다고들 하지만 어쩌면 위대한 사랑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은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때는 그것이 사랑인 줄도 모르다가 오랜 시간이 흘러서도 '그때 그게 사랑이었구나' 하고 인식하는 것에 위대한 사랑이 있었다. 엄마의 사랑은 늘 생색내는 법이 없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