끽연이라는 단어를 추모하며

by 알머리 제이슨

2019년의 17호 태풍인 타파(Tapah)는 13호였던 링링(Lingling)에 이어 한국을 가로질러 가는 꽤 위협적인 태풍이 되었다. 지금은 오키나와 해상을 지나가고 있으나, 이미 서귀포에도 꽤 강한 영향을 주고 있다. 제주에 살게 되면서 태풍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었다. 태풍은 정말 무서운 것이다. 그리고 태풍이 올 때 제주의 바람은 그야말로 위험한 것이다. 그래서 되도록 집 밖을 벗어나지 않는 게 낫다. 그런 이유로 토요일 오전, 창문을 굳건히 걸어 잠그고 90년대의 수필을 읽었다.


책을 뒤적거리다가 '끽연'이라는 단어를 발견하였다. 실로 오랜만이었다. 끽연이라는 단어는 요즘은 아무도 쓰지 않는다. 아마 대부분 어린 친구들은 무슨 단어인지 뜻도 모를 것이다. 정말 요즘은 아무도 쓰지 않는 단어다. 그래서 나는 이 단어가 너무 반가운 느낌이었다. 심지어 나는 담배를 피우지도 않는데 말이다.


정말로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서 설명하자면, 끽연(喫煙)은 '연기를 만끽하다'라는 한자어다. 쉽게 이야기해 담배를 피우는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담배를 피우는 것 이상의 낭만이 느껴지지 않는가? 연기를 만끽하다니.. 옛날 사람들, 그러니까 2000년대 이전 사람들의 터프한 매력이 있다. 예전에는 담배 피우는 공간을 '끽연실'이라고 한 적도 있었다. '흡연실'이라고 이야기할 때와는 다른 분위기가 느껴진다.


지금은 끽연 같은 단어는 쓰지 않는다. 이유를 생각해 보자면, 담배를 피우는 행위는 이제 사회적으로 배척해야 하는 것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꼭 피우고 싶은 사람은 되도록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조심스럽게 즐겨야 한다. 그런 분위기로 바뀌었다. 흡연실이라고 하면 상당히 기능적이고 건조한 공간이 떠오른다. 자유롭게 담배 피울 공간을 찾지 못한 한 무리의 낯선 담배쟁이들이 모여 건조하고 쭈뼛쭈뼛하게 담배를 피우는 그런 공간이 떠오른다.


실제로 예전에 다니던 회사(아주 큰 회사였다)에서 직원들이 담배를 피우려면 특정 흡연 공간으로 이동해야 했는데, 그 흡연실에는 엄청난 성능을 자랑하는 환기 시스템이 갖춰져 있었다. 사람들이 담배를 피우는 족족 나빠진 공기가 신속 강력하게 흡인되는 구조였고, 그래서 커다란 굉음이 항상 들렸다. 나는 담배를 피우지 않지만 그 흡연실 안을 지나갈 때마다 안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을 유리창을 통해 구경할 수 있었다. 정말 철저하게 기능적인 공간이었다. 가끔 흡연자들이 드나들면서 자동문이 열릴 때 지나가면, 그 압도적인 환기 시스템의 바람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반면 끽연실은 좀 다른 느낌이다. 끽연실이라는 것이 존재했을 때 나는 코흘리개였기 때문에 정확히 어떻게 생겼을지 알 수는 없다. 하지만 담배를 피우는 순수한 목적을 위해 신속하게 드나들어야 하는, 기능에만 충실한 공간은 아닐 것 같다. 냄새는 나지만 푹신한 소파에 앉을 수 있고,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도 뭔가 급할 것 없다는 표정일 듯하다. 극장 같은 곳에도 쉬는 시간이 존재하던 시절에, 비슷한 신사들끼리 모여 간단히 시간을 흘려보내는 위엄과 여유가 흐르는 공간의 느낌이 든다.


잘은 모르겠지만, 담배를 피우는 사람 입장에서는 담배가 주는 원초적 즐거움이 상당히 줄어들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든다. 충전시켜 들고 다니는 조그만 기계 장치로 담배를 피우는 게 대세가 된 시대다. 라이터를 이용해 불을 붙이고 폐 속 깊숙이 공기를 빨아들인 후, 쪽팔리거나 짜증 나거나 화난 감정을 폐 속에 스며든 연기에 실어 후우 하고 뿜어 내는 경험. 그런 경험은 좀 더 느리고 비효율적이고 아날로그적이어야 하지 않을까? 특히 수많은 비흡연자들이 노려보는 시선에서 자유로운 상태로 말이다.


지금의 사회는 흡연이라는 행위 자체를 몰아낼 각오가 단단히 되어 있다. 좋은 취지이지만 담뱃갑에 붙은 사진은 정말 혐오스럽다. 실제로 혐오감을 유발하는 게 목적인 사진이다. 혐오 자체가 공공선의 수단이 된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나는 개인적으로 발기부전을 암시하는 꼬부라진 담배 한 개비가 그려진 사진이 제일 효과적으로 보인다. 우리나라 수컷들의 성욕을 일거에 꺾어 버리는 위압감이 있는 데다 각종 종양이 득시글한 사진보다는 훨씬 얌전하다.


물론 공공장소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을 옹호한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다. 난 아예 담배를 피운 적이 없는 비흡연자다. 때문에 담배냄새를 정말 싫어한다. 특히 공원 같은 곳에서 어린이들이 지나가는 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를 피우는 꼰대 같은 아저씨들을 보면 헤드락을 걸고 꿀밤을 때려주고 싶은 마음도 든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그런 생각도 든다. 모든 인간은, 꼭 흡연 같은 행위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자기 파괴적인 취미를 즐기고 싶어 한다. 왜 그런진 모르겠지만 본성이라는 라커룸의 가장 깊은 구석에 있는 작고 초라한 사물함을 열어 보면, 그런 것들이 하나씩은 꼭 들어있다.


그런 사물함은 앞으로도 절대로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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