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 수원시 민방위 대원들의 강의를 맡아서 너무 큰 영광입니다!”
스스로를 김박사 웃음연구소장(가명)으로 밝힌 강사분은 활기차고 의욕적이고 우렁찬 목소리로 민방위 교육의 2교시를 열었다. 그 에너지가 너무 긍정적이고 강해서, 결과적으로는 민방위교육장의 오래된 습지 같은 분위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맨 앞자리에 앉아있었던 나는 나머지 사람들이 어떤 느낌을 받았을지 호기심이 들었다. 뒤를 돌아 나머지 청중들의 반응을 확인해 보았더니 역시나 아무런 반응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 어떤 자극도 민방위 대원을 움직일 수는 없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글로벌 평균으로 보면 굉장히 근면하다. OECD 국가 중 노동시간이 가장 높다. 혹자는 멕시코에 이어 2위라고 하지만, 나는 안다. 아마 멕시코 인간들이 뻥을 쳤을 것이다. 아니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업무량보다 적게 일한 걸로 뻥을 쳤을 것이다. 주 52시간제로 조금씩 분위기가 바뀌고는 있지만, 아무튼 우리나라 사람들은 전반적으로 근면하다.
에너지 또한 많다. 월드컵 시즌의 열기는 세계적으로도 알려져 있다. KPOP이 괜히 뜨는 게 아닐 것이다. 놀 때의 열정을 보면 한국사람들만의 탁월함이 있다. 생기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정의 사각지대는 분명히 존재한다. 오래도록 소멸하지 않을 사각지대. 우리나라에서 군중의 에너지가 가장 낮은 곳을 찾아보고 싶다면... 바로 예비군 훈련장을 가 보면 된다. 멀리서 보면 나무늘보들에게 군복을 입혀 놓은 것처럼 보일 것이다. 단체로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긴 하지만, 슬로모션처럼 발걸음이 느리다. 예비군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생기가 없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다. 예비군 훈련장보다 더욱 나태하고 정적인 곳을 찾으라면, 당연히 민방위 교육장이다. 무미건조함 측면에서 예비군이 사막이라면, 민방위는 화성(Mars)이다. 예비군 훈련을 받으며 나태함을 마음껏 발산하던 그 사나이들이 몇 년 더 나이가 들었고, 어두컴컴한 극장형 강의장에서 목받침이 있는 의자에 앉아 PPT로 발표하는 강의를 듣는다. 마네킹을 200개 정도 앉혀 놔도 크게 구분이 가지 않을 것이다.
어쨌든 그런 이유 때문에, 민방위 교육에서 만난 2교시 강사님의 밝은 모습은 너무나도 낯설었다. 맥락과 맥락의 괴리가 너무 클 때 우리는 초현실적 감각을 느끼게 된다. 물론 빈말이긴 하지만 ‘명품 수원시 민방위 대원’ 이라던지 ‘영광’ 이라던지 그런 단어들을 듣다 보니 괜히 내가 다 부끄러웠다. 마치 마네킹을 앞에 두고 칭찬을 하시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는지 모르는지 강사님은 연신 얼굴에 웃음을 띄며 준비한 강의를 이어 나갔다. 이미 오래전 일이기 때문에 강의 내용은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강의 PPT에 사용된 애니메이션 효과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온갖 효과음을 다 활용한 PPT는 한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뾰로로로롱 하는 소리가 난다거나, 연극무대의 커튼이 넘어가는 애니메이션이 나온다거나, 슈우우웅 하는 비행기 소리가 나거나 그런 식이었다. 때때로 졸려서 견딜 수 없을 때면 쿠아아아앙 하는 폭탄 소리가 나와 모든 민방위 대원들의 단잠을 깨트렸다. 대원들의 표정에 불쾌함이 가득했다. 물론 강사님의 얼굴에는 시종일관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어쩌면 그분의 입장에서는 '위대한 실험' 같은 걸 해본 것일까? '민방위 대원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면 세상에 훔치지 못할 마음은 없다.' 그런 도전일 수도 있다. 실제로 그러할 것이다. 민방위 대원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면 세상에 움직이지 못할 마음은 없다. 하지만 되도록이면 그냥 좀 뒀으면 좋겠다. 세상에 움직일 마음은 많다. 꼭 그게 민방위 대원일 필요는 없지 않은가?
때로는 조금 추하고 별로라고 해도, 그대로 두는 게 나은 편인 것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