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베이 배드 보이

by 알머리 제이슨

"오빠 근데 저 왠지 그 맛이 무슨 맛인지 알 것만 같아요."


런던에서 유학 중이던 후배 김예니는 London Eye를 마주한 해 질 녘의 템즈 강변 산책로를 나란히 걷다가 뜻밖의 이야기를 꺼내었다. 그녀 또한 봄베이 배드 보이를 겪어 보았던 것이다. 나와는 조금 다른 방식이지만 말이다.


몇 년 전 런던에 출장을 갔을 때의 일이었다. 나흘 남짓 머물며 가장 난감했던 것은 역시 음식이었다. 원래 외국에서 한국음식을 그리워하는 타입은 아니다. 하지만 런던의 음식은 솔직히 많이 실망스러웠다. 뭐랄까, 어떤 식당에 들어가도 가격은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맛은 더더욱 만만치 않았다. 런던에서 먹은 대부분의 식사는 옆 부서의 부장님과 맞담배를 피우는 것 같은 맛을 하고 있었다. 못할 건 없지만 전혀 즐겁지는 않은 그런 것 말이다. 부장님의 아재 개그같이 무미건조한 식사를 한 지 4일째가 되자, 몸은 전에 없이 한국의 매운맛을 갈구하기 시작했다. 매운맛을 떠올리는 순간 지금 당장 무언가를 찾아야 한다는 초조함이 생겼다. 그렇지만 어디서 어떻게 매운맛을 찾을 것인가?

호텔 앞 편의점에 들렀을 때 퍼뜩 뇌리를 스친 것은 '컵라면'이었다. 컵라면은 아시아의 상징 같은 것이므로, 어쩌면 나의 고민을 해결해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는 편의점을 한 바퀴 돌다 그럴듯한 컵라면 가판을 발견하였다. 거기에는 pot noodle이라는 이름으로 세 가지 색의 컵라면 종류가 구비되어 있었다.

첫 번째의 흰색 컵라면은 chicken & mushroom flavour라는 타이틀이었다. 아니다. 이것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다. 흰색 포장에 든 치킨과 버섯 컵라면 같은 걸 먹었다가는 돌이킬 수 없을 것이다. 두 번째 노란색 컵라면에는 original curry flavour라고 적혀있었다. 카레맛이라.. 글쎄 좀 아쉽긴 하지만 약간은 도움이 될 듯했다. 만약 고추장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내 인내심을 조금이나마 연장해줄 유일한 대안이었다. 마른침을 삼키며 나는 커리맛 옆에 있는 마지막 컵라면을 집어 들어 보았다.

마지막의 검은색 컵라면에는... 'Bombay Bad Boy'라는 타이틀이 붙어 있었다... 나는 극심한 혼란에 빠지게 된다. 이것은. 대체. 무슨 맛이란 말인가? 굉장히 인종차별적이면서도 호전적이면서도 화끈한 그런 디자인과 네이밍이었다. 컵라면 이름이 '못된 뭄바이 사나이'라니 그것은 좀 멀리 갔다는 생각이 들었다.(봄베이는 인도가 식민지이던 옛날의 표현이며 현재는 뭄바이가 맞는 지명이다)

결국 나는 Bombay Bad Boy를 살 수밖에 없었다. 먼 훗날. 딸내미가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아비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데 '그때 아빠가 런던에서 말이야.. Bombay Bad Boy 컵라면은 너무 위험해 보여서 original curry flavour로 타협했단다'라고 변명하고 싶지는 않았다. 딸도 없었고 아내도 없던 시절이지만 일단 그런 마음이었다. 패키지는 시크한 검정 바탕에 위협적인 노란색과 빨간색 글씨가 크게 박혀 있었다. 그 옆에 보니 칠리 페퍼 같은 그림도 붙어 있었다. 아마도 내 매운맛 금단 증상을 낫게 할 최고의 선택으로 보였다.

어쨌든 그렇게 '못된 뭄바이 사내' 컵라면을 사서 호텔에 가져다 두고 나서 나는 후배를 만나기 위해 웨스트민스터로 떠났다. 오랜만에 만나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조금 전 편의점에서 획득한 컵라면에 대한 이야기를 신나서 떠벌였다. 그런데, London Eye를 마주한 해 질 녘의 템즈 강변 산책로를 나란히 걷다가 나는 김예니 29세에게서 뜻밖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오빠 근데 저 왠지 그 맛이 무슨 맛인지 알 것만 같아요."

이야기는 대략 이러하다. 그것은 김예니가 인도 뭄바이를 여행하던 때였다. 열기와 먼지. 혼란과 평화가 어지러이 중첩된 뭄바이의 길을 정처 없이 거닐었다고 한다. 자아와 미래에 대한 하염없는 공상에 빠져있던 그녀는 느닷없는 경적소리에 옆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거기에는 먼지 하나 없는 매끈한 스포츠카의 운전대를 잡은 채 이글거리는 눈망울로 김예니를 바라보는 젊은 인도인 남자가 있었다.

카스트 제도의 꼭대기에서 자본과 권력의 안락함 속에 커온 철부지 인도인 도련님은 김예니에게 차에 타라고 자신만만하게 손짓하며 말한다. 꺼몬 꺼몬 쁘리띠 레이디(come on, come on pretty lady). 게띤(get in)! 게띤더까아(get in the car)! 왠지 인도식 영어 악센트가 그대로 들리는 것 같은 생생한 이야기였다.

오빠 아마 그런 게 Bombay Bad Boy 아닐까요?라고 김예니는 말을 맺는다. 그리고 나는 과연 그럴지도 모른다는 기대감과 함께 호텔로 돌아오는 빨간색 2층 버스에 올라탔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그 컵라면은 매콤함과 느끼함이 완벽히 조화를 이루는 해괴한 맛을 하고 있었다. 김예니의 비유가 단 1그램도 빗나가지 않는 바로 그 맛이었던 것이다. 매콤하지만 너무나도 느끼했다. 좁은 호텔방에는 때마침 젓가락도 없었다. 비치된 티스푼으로 묘한 맛을 내는 컵라면을 퍼먹다가 왠지 좌절감이 들었다. 추가로 초코 셰이크, 우유, 치킨 샌드위치, 바운티 코코넛 초코바 등을 흡입하여 주린 배를 채웠다. 그러고 나서 약간은 미안한 마음에 팔굽혀펴기 스무 번을 해 보았다.


한편, 뭄바이의 깊은 밤길에는 스포츠카에 올라탄 인도인 바람둥이가 흰자를 번뜩이며 지나가는 여자들을 흘깃거리고 있을 것이다. 여전하게도 말이다. 다음 생에는 수컷 사마귀로 태어나서 짝짓기 후에 암컷에게 잡아먹혀 버렸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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