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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머리 제이슨 May 07. 2020

무사시의 거품과 생존

 지금 다니고 있는 동네 헬스장은 6층짜리 건물에 있다. 이 건물 3층인가 4층에는 '놀숲'이라는 만화방 체인점이 있다. 사실은 헬스장을 1년 넘게 다니면서 한 번도 간 적이 없었는데, 아내가 최근에 나를 설득해 데리고 갔다. 아침 운동을 끝내고 개운하게 샤워를 한 후, 만화방에서 식사를 시켜 먹으며 만화를 보게 되었다. 꽃샘추위가 봄을 배신하기 직전, 이제 추위는 끝났다는 기대를 할 만한 화창하고 따뜻한 날이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만화 자체가 아니라, 초등학생의 입맛을 제대로 저격한 듯한 분식 메뉴의 스펙트럼이었다. 아내는 볶음밥을 시켰고, 나는 짜장면을 시켰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매우 흡족한 식사였다. 운동을 끝내고 먹기엔 영양가가 떨어지는 감이 있었지만, 저렴한 가격이 좋았다. 맛 또한 결코 빠지지 않았다. 적어도 그 가격에 먹기에는 충분한 맛이었다. 그러면서도 식사를 끝내고 나면 전혀 기억에 남지 않는 쿨함이 있었다. 화면을 끄면 전혀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 성형수술이 잘 된 신인 아이돌. 그런 식사였다. 

 문제는 생각보다 만화의 종류가 많지 않다는 것이었다. 사실은 내가 아는 만화가 많지 않은 것이었다. 어찌 되었든 지금의 나는 만화를 보던 나이에서도 20년 정도 멀어졌기 때문이다. 내가 보던 만화 중 아직까지 연재되는 것은 배가본드 밖에 없었다. 슬램덩크의 작가 타케히코 이노우에가 슬럼프와 싸우며 상상을 초월하는 느린 속도로 연재하고 있는 만화다. 25권인가 정도까지 보고 말았는데 만화방에서 보니 37권까지 나와 있었다. 그래서 보던 곳 즈음을 찾아서 기억을 더듬으며 다시 보게 되었다. 역시 20년 전의 기억을 더듬기란 쉽지 않았다. 


 붓으로 그린 작화력과 철학적인 내용이 유명한 만화지만, 딱히 애정을 가지고 보던 것은 아니라서 그림 위주로 휙휙 넘기며 보았다. 가끔씩 아내가 남긴 볶음밥을 숟가락으로 퍼 먹다가 다시 만화를 보았다. 그러다 보니 한 가지 궁금증이 생긴 것은 결말이었다. 미야모토 무사시라는 실존 인물의 일대기를 그린 만화라는 것만 알았지, 그 인물이 실제로 어떤지는 잘 몰랐다. 그래서 만화를 보다 말고 휴대폰을 들어 미야모토 무사시에 대해 검색해 보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만화방에 돈을 내고 내 휴대폰을 본 셈인데... 아무튼 유익한 시간이었다. 

 한 30분 정도 검색을 하다 보니 만화에 대한 기대감은 조금 떨어지게 되었다. 반면 미야모토 무사시를 둘러싼 진실에 대해서는 후대인들끼리 많은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지배적인 의견은 무사시라는 인물에 거품이 많이 꼈다는 것이다. 실제로 무용담의 상당 부분이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한다. 유명한 사무라이라고는 하지만 실제로 결투에서 승리를 했다는 상대들도 듣보잡에 가깝고, 현재 알려진 주된 일화는 무사시 본인이 쓴 책에 의존하고 있다. 결국 무사시의 일대기는 자화자찬적으로 부풀려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그래도 인정받고 있는 부분은 '오륜서'라고 하는 병법서를 집필한 것이다. 사실 이 책 덕분에 무사시가 후대에 알려지게 된 것이고, 책 내용 자체는 상당한 깊이가 있다고 한다. 그렇지만 무예가로서의 무사시의 실력은 여전히 의혹이 많다는 것이 검색으로 찾은 내용이다. 결과적으로 무사시는 정말 강한 사무라이였을 수도 있지만 글만 잘 쓰는 뻥쟁이일 수도 있다진실은 뼈와 함께 깊은 곳에 묻혀 있다. 

 어쩌면 만화의 작가가 연재를 미루는 것에도 그런 이유가 있을지 모르겠다. 처음에 연재를 시작할 때는 엄청난 무예가의 일대기를 그리고 싶었겠지만, 시간이 지나며 역사가 고증될수록 무용담이 거품일 수도 있다는 게 알려졌으니... 어쩌면 약간의 배신감 같은 것도 들었을지 모르겠다. 그런 상황에서 끝까지 주인공을 미화시켜야 하는 압박도 이겨 내기 쉽지 않을 것이다. 

 

 반면 인간의 허술함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일단 100년 정도 지나면 거의 모든 사건이 퇴색하게 마련이다. 수많은 검호들이 있었겠지만, 그중에 이름이 남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름을 남기는 사람은 가장 강한 사람이 아니라 (오륜서를 쓴 무사시처럼) 기록을 한 사람이다. 인간은 스토리를 너무 좋아한다. 진실과 스토리 중 무엇을 택할 것이냐고 하면 아마도 스토리를 고를 것이다. 


 스토리와 진실이 1:1로 검술 대결을 펼친다고 해도 스토리가 이길 것이다. 둘이서 지루하기 짝이 없는 공방을 주고받다 보면 진실이 먼저 늙어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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