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에서 본격적인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때도 지금도 크고 좋은 회사다. 하지만 크기 때문에 생기는 서글픔 같은 것도 있었다. 처음 신입사원이 되었을 땐 강남으로 출퇴근을 했다. 대부분의 디자이너 동기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그런데 몇 달 되지 않아 내가 소속된 부서만 통채로 수원에 있는 개발 연구소에 편입되었다. 그래서 갑자기 동기들을 뒤로 하고 홀로 수원으로 출퇴근을 하게 되었다.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거의 귀양가는 기분이었다. 갑자기 출퇴근 시간이 한 시간 이상 늘어났다. 금요일 저녁 퇴근길은 편도 2시간 반을 길에서 허비했다. 수원의 삼성전자 캠퍼스는 거대하고 황량했다. 사무실에서 10분을 걸어 나가야 회사 정문이 나올 정도였다.
나는 신입사원이었기 때문에 새로 이동한 부서에 적응하기 위해 친해질 상사들을 물색했다. 때마침 나를 거두어 준 분들은 30대 중반의 남자들이었다. 점심시간에 회사 헬스장에서 함께 운동을 하면서 친해졌다. 아니. 친해져서 함께 운동을 시작한건가? 아무튼 같이 운동도 하고, 같이 점심도 먹으며 많이 친해졌다.
특히 친했던 네 명의 아저씨 패거리가 있었다. 궁금하진 않겠지만 각각의 성씨는 왕, 배, 황, 여. 모두의 주된 관심사는 '재테크'였다. 어떻게 하면 빨리 돈을 더 벌어서 이 지긋지긋한 회사를 벗어날 수 있을까? 그런 열망이 간절했다.
일할 때는 지겹고 힘들고 스트레스도 심했지만, 점심을 먹을 때는 모두가 유쾌하고 힘이 넘쳤다. 회사 안에 거대한 구내식당이 세 개나 있었다. 우리는 그중 한 곳에서 잽싸게 밥을 먹고, 트루먼쇼 세트장만큼 거대한 회사 단지 곳곳을 산책했다. 이렇게 걷고 걸어도 여전히 회사 안이라는 슬픔을 함께 나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봄날씨를 함께 즐겼다.
때때로 패거리 중 누군가가 회사 버스를 타지 않고 승용차로 출근하곤 했다. 그러면 모두가 그 차를 타고 회사 단지 밖으로 나가 외부에서 점심을 먹었다. 작은 일탈이었다. 내가 처음으로 자가용을 뽑자 '차들이'를 해야 한다며 모두가 내 차에 몰려 타더니 햄버거를 먹으러 갔다. 그렇게 나갔다오면 점심시간을 두 시간도 넘게 쓰곤 했다. 먹을 메뉴야 뻔했지만, 회사 밖으로 나가서 점심을 먹는 날은 그렇게 신날 수 없었다.
그 패거리의 리더격인 형님은 나보다 다섯살이 많았다. 성이 왕씨였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왕아저씨라고 불렀다. 서울대를 나오고 미국 유학까지 다녀왔는데 수원에서 월급쟁이나 하고 있다며 한탄하는, 자조적이지만 유쾌한 형님이었다. 하루는 이 분이 차를 가지고 왔다. 그래서 다함께 20분 정도 걸리는 맥도날드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객원 멤버가 추가되어 성인 남자가 다섯명. 왕아저씨의 비둘기색 폭스바겐 골프에 꼬깃꼬깃 앉아 점심 드라이브를 시작했다.
봄이 완전히 무르익고, 곧 여름이 올것 같은 쾌청하고 따뜻한 날씨였다. 왕아저씨는 기분이 아주 좋아졌다. 생전 열지 않던 선루프를 열었다. 조그만 천창으로 따뜻한 바람과 눈부신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모두들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왕아저씨는 차오르는 기분을 주체할 수 없어 액셀을 밟으며 음악을 크게 틀었다.
마일리 사이러스의 'Party In The USA'였다.
거의 십 년 전의 일이지만, 아직도 그 때를 생각하면 부끄럽다.
수원 삼성전자에 다니는 소심하게 반항적인 유부남 다섯 명이, 조그만 선루프를 열고 바람을 맞으며 달린 게 부끄럽다. 미국 국민 여동생의 철지난 히트곡을 함께 들은 것도 부끄럽다. 그 날의 점심식사가 회사원들의 작정한 일탈이었다는 사실도 부끄럽다. 도착해서 먹은 맥도날드의 햄버거의 맛이 부끄럽다. 막내였던 내가 굳이 밀크쉐이크를 시켜서 감자튀김을 찍어 먹었던 것도 부끄럽다.
그 날의 짧은 드라이브가 5년 동안 삼성전자를 다니며 얻은 최고의 추억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쓴웃음에서도 단맛을 느끼게 된다. 많은 것이 누그러진다. 생각없이 살아 온 백인 미국 여자애가 부르는 십대 취향의 팝송 같은 것도 시간이 지나면 용서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노래를 중년 남자들이 함께 듣었던 것도 용서하게 된다. 그날 이후 아직도 혼자 운전할 때 가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마일리 사이러스, 케이티 페리, 케샤, 칼리 레이 젭슨 같은 철지난 틴팝 여가수들의 노래를 심취해서 듣는다. 자랑할 일은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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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생활에서 낭만을 찾는 것은 어렵다. 모든 것들이 평범하고, 건조하고, 프로다워야 하고, 이익 창출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회사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기억은 더더욱 특별해진다. 말하자면, 순수한 본성을 억누르고 '프로다움'을 강요받는 사람들끼리 생기는 연대감이 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과 순수한 모습을 되찾는 짧은 추억들은 더욱 소중해진다.
불평을 가득 안고 회사생활을 하루하루 버티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 이야기를 꼭 해주고 싶다. 어차피 일은 적당히 해도 회사는 굴러간다. 거기서 만나게 되는 (얼마 되지 않는)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 최대한 많은 일탈과 엉뚱함을 쌓으시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