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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머리 제이슨 Jun 25. 2022

삼다도에는 4다가 있다

제주에 내려와 사는 외지인들이라면 감각의 재구성을 흔히 경험할 것이다. 특히 성인이 된 이후에, 익숙했던 경험을 버리고, 완전히 다른 환경에 스스로 뛰어든 사람들이라면 말이다. 사실 겪어 보면 알겠지만, 도시에 살던 사람들이 제주에 정착하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다. 그냥 좀 다른 경험에 적응하는 시간이 있을 뿐이다. 적어도 유학이나 이민 같은 것보다는 훨씬 편하다. 


이전에 알던 친구들을 버리고 와도, 결국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게 된다. 비슷한 나이에 비슷한 결정으로 제주에 내려 온 사람들. 당연히 금방 친해질 뿐더러 유대감도 깊은 편이다. 가치관의 싱크로율이 높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주도에 와서 적응하는 데 좀 더 에너지가 드는 요소도 있다. 바로 날씨다. 정확히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제주도에서 날씨를 상대하는 것은 육지에서 날씨를 상대하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자극이 발생한다. 


일단 날씨의 변화무쌍함이 있다. 학창시절 지구과학 시간에 졸지 않은 사람이라면 기억할 것이다. 수분을 많이 머금은 공기가 산비탈을 만나면 구름이 형성되고 비를 뿌린다. 해수면에서부터 1950미터의 산꼭대기까지 완만한 경사가 이어진 제주도에서는 많은 비를 만날 수 있다. 가끔은 무서운 비를 만날 때도 있다.


몇년 전 회사를 다닐 때, 강남역 사거리에 홍수가 나서 도로가 완전히 물에 잠긴 적이 있었다. 그 때의 경험이 '경제적 피해'와 '정신적 불쾌함' 측면에서 더 심하긴 하다. 하지만 제주에서 쏟아지는 비를 만날 때는 좀 다른 형태의 경외감이 생긴다. 뭐랄까. 비가 나에게 말을 거는 것 같다. 비와 내가 좀 더 가까운 사이가 된 것 같다. 우산을 쓰건 안쓰건, 제주에서 맞는 비는 좀 더 영혼 깊숙히까지 파고 드는 느낌이다. 


비 뿐 아니다. 전반적인 날씨의 변화를 훨씬 예민하게 경험할 수 밖에 없다. 제주 날씨의 자극이 강한 것일 수도 있고, 육지에서는 다른 자극이 더 강하다 보니 날씨의 자극에 둔감했던 것일 수도 있다. 아무튼 제주에서 날씨의 변화를 피부로 체감할 때면 어떤 인격이 느껴진다. 날씨가 나에게 말을 거는 느낌, 아니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날씨가 거는 말을 내가 더 잘 알아듣게 된 것일지도. 날씨에게 느끼는 압도적 자극 같은 것이 분명히 존재한다. 


지방의 소도시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처음으로 서울 생활에 적응할 때도 지금과 비슷한 압도감이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주는 압도감이었다. 사람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하나같이 고유한 에너지를 뿜고 있었고, 그 모든 것에 노출되어 있는 (지방 소도시 출신의) 미필 남자인 나는 압도되었다. 키가 큰 사람, 살이 찐 사람, 발목이 가느다란 여자, 여드름이 많은 남자, 고함을 치는 할아버지, 지하철에 드러누워 떼를 쓰는 아이. 리어카에 막걸리를 싣고 종을 치며 인사하는 약간은 괴상하고 유쾌한 아저씨. 


사람이 더 나은지 날씨가 더 나은지는 모르겠다. 뭐가 되었든 환경이 바뀌며 겪는 압도감은, 처음에는 부담되지만 이윽고 인간을 성장시킨다. 또는 아주 미세하게 죽음으로 안내한다. 정말 슬픈 순간은, 너무 나이가 들어버려 아무것에도 압도감을 느끼지 못할 때가 아닐까.


여하튼 제주도에서 날씨가 주는 자극은 상당하다. 태풍이 올 때면 집구석에 틀어 박혀 제습기를 풀가동하며, 바람에 휩쓸리는 나무들을 불안하게 바라본다. 그리고는 길가에 떠돌고 있을 들짐승과 날짐승을 걱정한다. 태풍이 끝나고 말도 안되는 시퍼런 하늘에 무지개가 뜬 것을 보면, 언제 그랬는지 모르게 환희를 느낀다. 습도가 99%가 되는 해무 시즌에는 아가미가 달릴 것만 같다. 5월에 창문을 열고 운전하며 야자수가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을 볼 때는 세상을 다 가진 뿌듯함을 느낀다. 


이래나 저래나, 일상에서 마주하는 감각의 총량은 정해져 있다. 20-30대의 내 감각을 지배했던 것이 '인구'였다면, 40대의 내 감각을 지배하는 것은 '기후'다.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변화를 준 것 자체는 절대 후회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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