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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머리 제이슨 Apr 24. 2020

서귀포에 생긴 중국가정식집 방문기

 중문에 새로 생긴 헬스장에서 운동을 하고 혼자 점심을 먹게 되었다. 원래는 뜨끈하게 돼지국밥이나 먹을까 하고 국밥집을 찾았다. 네이버 지도를 보니 중문 초입에 가게가 하나 있다고 나와 그곳을 찾아 나섰다. 부영호텔에서 중문 초입으로 가는 길을 창문을 열고 운전했다. 4월이지만 공기는 차가웠고, 공기는 차가웠지만 하늘은 새파란 색이었다. 중앙분리대에 야자수가 심어져 있는 잘 포장된 도로를 달리니 기분이 좋아졌다. 게다가 가장 맛있는 식사는 운동하고 나서 허기진 상태에서 먹는 식사다. 

 도로의 중간쯤 지나가는데 오른쪽에 얼핏 '중국가정식'이라는 간판이 보였다. 무심코 눈길을 줬는데 가게 안쪽에 보니 핑크색 네온사인으로 '니취팔러마'라고 불이 켜져 있었다. 그 순간 머릿속에 국밥은 지워지고 중국가정식에 대한 호기심이 가득 찼다. 하지만 차를 달리다 이미 지나쳐버렸기 때문에 다음을 기약하고 원래 계획했던 국밥집을 찾아갔다. 


 아니나 다를까 국밥집은 문을 닫았고, 보말칼국수 집으로 바뀌어 있었다. 뭔가 심상치 않은 기분이 들었다. 


 왠지 심장이 조심스럽게 두근거리는 기분이었다. 나는 차를 더 몰고 중문 로터리를 한 바퀴 돌았다. 그리고 야자수가 놓인 도로를 다시 달려 중국가정식 집으로 향했다. 입구에 차를 세우고 가게 앞에 들어섰다. 데크로 만들어진 야외 자리가 몇 개 있었고, 데크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면 가게 정문이 나왔다. 가게 안은 불이 꺼져 있는지 어두웠다. 니취팔러마 사인만 야한 색으로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흠... 문을 닫은 것일까? 허탕 친 것일까? 

 조심스럽게 가게 정문을 열어 보았다. 다행히 주인아저씨가 있었다. 이영표를 닮은 아저씨였다.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왜... 의아한 표정일까? 지금은 가게 쉬는 시간인가? 이번에도 허탕인가? "식사되나요?" 하고 물어보았다. "예" 하고 짧은 대답이 돌아왔다. 자세히 보니 진짜 중국인 아저씨였다. 이럴 수가. 뭔가 제대로 찾아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가게의 인테리어도 미묘한 센스가 돋보였다. 모던하지만 확실히 중국집이었다. 밖에서 보니 어두웠는데 안에 들어와 보니 서귀포의 눈부신 햇빛이 그대로 들어와 화사한 느낌이었다. 창가 쪽으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점심시간인데도 가게에 손님은 내가 유일했다. 아저씨가 메뉴판 세 개를 들고 왔다. 하나는 사진을 직접 찍고 짧은 코멘트를 적어 놓은 메뉴판이었다. 메뉴판의 코멘트는 한국 사람이 글을 쓴 것이었다. 마파두부와 마라탕면 사이에서 살짝 고민을 하다가, 마라탕면을 시켰다. 마라탕면은 거절하기 힘들었다. 


 기다리며 인스타그램에 가게 이름('길리추팡'이라는 곳이다)을 검색해 보았다. 사진이 많이 올라오진 않았지만, 사람들의 평도 나쁘지 않았다. 반찬으로 나온 볶은 땅콩과 자차이를 먹으며 시간을 보냈다. 반찬으로 무채도 하나 더 나왔는데 희한하게 맛있었다. 가게에 손님은 나밖에 없었지만 생각보다 조리시간이 오래 걸렸다. 중국집인데 빠르지 않다니! 그것도 뭔가 다른 느낌이었다. 가게를 지키던 아저씨가 주방에서 혼자 일을 하고 있었다. 조리도구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느긋하게 들렸다. 

 문득 20년 전 홍대앞에서 하숙할 때 종종 먹었던 승리원이라는 중국집이 생각났다. 맛이나 서비스는 기억에 남지 않는다. 하지만 속도 하나만큼은 무시무시했다. 한 번은 혼자 승리원에 가서 짜장면을 시킨 적이 있었다. 카운터에 대고 짜장면 하나 주세요 하고 네 하는 대답을 들은 후 고개를 뒤로 돌려 창 바깥을 쳐다보았다. 여름 햇살이 따갑게 쏟아지는 그런 날이었다. 에어컨 바람 쐬니 살 거 같네 하고 생각한 후 고개를 다시 돌렸는데 짜장면이 나와있었다. 한 12초 정도 걸렸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그게 가능했는지 모르겠다. 인생에서 가장 빠른 중국집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마라탕면이 나왔다.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를 했는데 한국말을 못 하시니 아저씨는 대꾸 없이 그냥 들어가셨다. 전복 새우 건두부 버섯 배추 오징어 등이 정갈하고 푸짐하게 세팅되어 있었다. 젓가락으로 소복이 쌓인 해산물 위에 놓인 배추 조각을 한 장 집어 들었다. 빨간 기름이 송골송골 맺힌 푹 익혀진 배추였다. 입에 집어넣으니 즙이 가득 나왔다. 나는 제대로 찾아왔다는 확신이 들었다. 

 한 젓가락 들이키는데 다른 손님이 들어왔다. 서퍼임이 분명해 보이는 파마머리에 콧수염이 난 아저씨였다. 여기 포장도 되나요? 하고 질문했다. 중국인 아저씨는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몇 번 되풀이해서 묻다가 콧수염 아저씨는 영어로 테이크아웃? 하고 물어보았다. 손으로 바깥을 가리키며. 중국 아저씨가 고개를 끄덕이자 몇 개 요리를 주문한 후 콧수염 아저씨는 전화를 걸었다. "포장된다니까 지금 밥 지어놔~" 누군가 같이 점심을 먹을 사람이 있나 보다. 

 그 와중에 마라탕면은 정말 맛있었다. 나는 구슬땀이 맺힌 알머리를 연신 닦아내며 마라탕면을 흡입하였다. 잠시 뒤 콧수염 아저씨는 포장 음식을 받고 가게를 나섰다. 서핑보드 캐리어가 달린 픽업트럭을 타고 떠나는 모습이 보였다. 역시 서퍼였다. 서귀포의 햇살이 차 지붕에 반사되어 번쩍거렸다. 반찬 한 조각 남기지 않고,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았다. 이렇게 완전히 클리어한 식사는 오랜만이었다. 이런 마라탕면을 한국에서 맛보고 나면, 동아시아의 미래를 낙관하게 된다. 


 휴대폰을 꺼내어 '맛있어요'가 중국어로 뭔지 찾아보았다. 하오츠라고 한다. 좋아. 계산을 할 때 하오츠를 시전하자. 하지만 그 사이 다른 여자분이 한 명 들어왔다. 그리고 한국어를 유창하게 하는 한국사람이었다. 알고 보니 그분이 사장님이었다. 카운터에서 계산을 할 때 나의 하오츠는 갈 곳을 잃었다. 나는 한국말로 맛있다고 이야기하고 가게를 나섰다.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편의점에 들러 파인애플 맛 오란씨를 한 캔 샀다. 캔을 따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한 모금 마시고 나니 얼얼한 매운맛이 달달한 파인애플과 탄산을 만나며 싸악 내려갔다. 기억에 남을 만한 점심식사였다. 이럴 때는 지구의 미래를 낙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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