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선물을 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개인적으로는 선물은 주지도 않고 받지도 않는 주의다.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친구가 적어지는 점이 문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물을 주고받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다. 엄마 손에 끌려 억지로 예방접종을 맞는 철없고 괴팍한 어린이처럼, 때때로 선물에 대해 고민해야 하는 때가 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선물을 주기 위한 요령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고 있다. 숀 코네리 덕분이다. 2020년에 별세한 숀 코네리는 원조 제임스 본드다. 다니엘 크레이그도 본드 역을 멋지게 소화해서 유명해졌지만, 역시 진짜 제임스 본드는 숀 코네리다. (라고 한다. 너무 옛날이니 나도 본 적은 없다.)
숀 코네리는 노년에 찍은 영화에서도 매력이 철철 넘친다. 보통은 '중후하면서도 에너지가 넘치는 섹시한 액션 노신사' 역할이었다. 하지만 '파인딩 포레스터'에서는 평생을 은둔한 쇠약한 노작가로 나왔다. 주인공 윌리엄 포레스터는 평생 스포트라이트를 피해 숨어 산다. 하지만 우연히 같은 아파트에 사는 흑인 소년의 멘토가 된다. 거기서 숀 코네리가 주인공 흑인 소년에게 선물에 대해 조언을 준다.
"누군가의 마음을 열고 싶다면, 생각지도 못한 시기에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주어라."
정말 좋은 조언이다. 물론 성격상 제대로 실천하지는 못했다.
결혼 후 10년이 지나면서, 자본주의의 늪에 빠진 와이프와 나는 현실적이고 건조한 부부가 되었다. 로맨스 같은 건 과연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가장 최근에 있던 발렌타인데이 때, 불현듯 그 문구가 생각났다. 우리나라는 보통 발렌타인데이는 여자가 남자에게 초콜릿을 선물한다. 그리고 남자는 3월 14일 화이트데이 때 그 보답을 한다. 와이프는 그런 풍습에 코웃음을 쳤다.
서양에서는 그런 룰이 없는데 왜 우리나라만 희한한 풍습이 있냐고. 사실 나도 동감하는 바였다. 하지만 이번 발렌타인데이 때는 뭔가 있으면 좋지 않을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연애시절, 심지어 신혼 때만 해도 몇만 원짜리 초콜릿을 이유 없는 타이밍에 이유 없이 선물하기도 했다. 윤소운(당시 20대 후반)은 매우 기뻐했다. 하지만 초콜릿을 잘 안 먹기 때문에 70% 정도는 결국 내가 먹게 되었다. 윈윈win-win이었다.
그리하여 40세를 맞이한 서귀포의 아저씨는, 2023년 2월 14일 아침. 초콜릿 사냥에 나섰다. 문제는 서귀포는 도시가 아니라는 데 있다. 선물용으로도 좋은 초콜릿을 구하기 쉽지 않다. 나는 서귀포 아저씨기 때문에, 1차원적인 솔루션을 찾았다. 네이버 지도에 '서귀포 수제 초콜릿'이라고 검색했다.
딱 하나의, 초콜릿 전문점이 검색 결과에 떴다. '미카의 달콤한 작업실'.
너무 한 번에 찾아져서 오히려 불안해졌다. 인스타그램 계정을 찾아서 들어가 프로필을 살펴보았다.
<초콜릿에 제주의 자연을 담다>
- 제주에서 꼭 사야 하는 초콜릿
- 16년 차 쇼콜라티에 미카의 초콜릿카페
- 평일 오전 10시~오후 6시
- 정기휴무:월, 화
- 반려견 입장가능
- 발렌타인데이 이벤트로 매출의 10%는 캄보디아 어린이들의 책가방 구입에 사용됩니다.
내가 찾는 모든 것이 있었다. 이곳이었다. 심지어 캄보디아 아이들도 도울 수 있다니. 강아지 산책을 핑계로 아내를 두고 만수르(8세, 비숑 프리제)와 집을 나섰다. 차로 30분 정도 달려 가게 오픈 시간에 맞춰 도착했다.
잔디가 깔린 마당이 있고, 마당 한쪽에 가게로 들어서는 미닫이문이 있었다. 문을 열자 전체적으로 묵직한 우드톤의 아담한 카페 겸 작업공간이 나타났다. 그런데 아무도 없었다. 너무 일찍 왔나? 모기만 한 목소리로 '계세요?' 하고 누군가를 불러 보았다. 초콜릿 가게에서 누군가를 부르는 40세 서귀포 아재의 자신감 없는 목소리. 5초 후, 거기에 화답하는 하이톤의 목소리가 돌아왔다. '네 안녕하세요!'
16년 차 쇼콜라티에로 보기엔 상당히 어려 보이는, 작은 키에 피부가 하얗고 큰 눈을 가진 사장님('미카'로 추정)이 앞치마를 하고 나타났다. 쭈뼛쭈뼛하며 발렌타인데이 초콜릿을 고른다고 하자, 능숙하게 초콜릿 종류와 특징을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다른 손님들이 자주 사가는 패키지 종류도 소개해 주었다. 내가 얼빠진 표정을 풀 기색이 보이지 않자, 카운터 옆 쪽으로 데려와 한 알씩 초콜릿들을 시식시켜 주었다.
말차와 카카오버터로 만든 한라산 모양의 초콜릿, 커피콩과 아몬드 등에 현무암의 구멍 뚫린 모양처럼 초콜릿을 씌운 초코송이들. 비자림 나무껍질을 형상화한 초콜릿 시리얼, 미니 한라산과 초코송이가 번갈아 들어있는 선물용 포장세트, 생 초콜릿, 르뱅 쿠키 등등... 하나씩 맛본 나는 어색함을 감추기 위해 음~ 하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더 어색해졌다.
심사숙고한 끝에, 선물용 초콜릿 상자 두 개와 아망송이(현무암 모양의 아몬드 알맹이 초콜릿) 하나, 커피송이(커피콩 알맹이 초콜릿) 하나, 비자림 바크(초콜릿 시리얼) 하나를 주문했다. 잠깐 고민하다가 르뱅 쿠키도 하나 추가했다. (쿠키는 결국 차에서 다 먹어치워 와이프는 모른다.)
사계리는 날씨가 따뜻할 때 오면 항상 신나는 일이 생기는 곳이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았다. 선물이 떠오르지 않을 때 찾아 올 곳이 생겼다. 수르는 초콜릿 봉투를 킁킁거렸다. 안 돼. 개는 초콜릿 먹으면 안 된대.
그렇게 초콜릿을 사고, 르뱅쿠키를 우물거리며 다시 운전을 시작했다. 중간에 와이프는 왜 이렇게 안 오냐며 전화를 했다. 둘러댈 거짓말이 떠오르지 않아 솔직하게 말했다. 발렌타인데이 초콜릿을 사느라 늦었다고. 아내는 크게 티를 내진 않았지만 꽤 기뻐했다. 생각지도 못한 때 생각지도 못한 선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전히 70%의 초콜릿은 내 몫이었다. 이번에도 윈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