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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머리 제이슨 Mar 17. 2023

워싱토니아 로부스타

때때로 예상치 못한 이에게 뭔가를 배울 때가 있다. 한 번은 야자수가 나에게 훈수를 둔 적이 있다. 


처음 제주살이에 관심을 가진 후, 정찰 겸 2박 3일로 여행을 온 적이 있었다. 2018년 여름이었다. 중문에 있는 호텔에서 1박을 하고, 서귀포 신시가지에 있던 아파트 몇 군데를 구경하기 위해 부동산을 찾았다. 하지만 부동산을 방문하기도 전에 이미 결심이 굳어졌다. 서귀포에 살아야겠다고.


이유는 워싱토니아 로부스타 때문이었다. 


서귀포를 동서로 잇는 메인 도로의 이름은 '일주로'다. 월드컵경기장을 경계로 해 동쪽은 일주동로, 서쪽은 일주서로라고 부른다. 그중에서도 중문과 서귀포 구시가지 사이를 잇는 일주로는 중앙 분리대 전체에 야자수가 심어져 있다. 뒤에 알았지만 그 야자수의 이름이 '워싱토니아 로부스타'였다.


(롯데호텔에 심어진 워싱토니아 로부스타)


중문의 숙소에서 신시가지의 부동산으로 향하는 12분의 짧은 드라이브에서, 나는 서귀포에게 마음을 완전히 빼앗겨버렸다. 하늘은 수도권에서 한 번도 볼 수 없던 새파란 색이었다. 8월의 적란운이 콜리플라워처럼 뽀글뽀글한 자태로 하늘 높이 치솟고 있었다. 그리고 도로 가운데 일렬로 늘어선 야자수까지. 


대한민국에서 열대의 정취를 느끼며 살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구나. 마음은 기울어졌다. 부동산 아주머니의 소개로 아파트 한 채를 구경했고, 다음날 바로 연세를 계약했다. 내 인생은 그 이후로 완전히 달라졌다. 


야자수는 말하자면, 제주 이주를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던지는 후킹 메시지다. 이래도 안 올 거야? 하는 자신감이 느껴진다. 가로수뿐 아니라 아파트 단지, 올레길 산책로 등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야자수의 종류도 다양하다. 약간 소심해 보이는 소철나무, 거대하고 뚱뚱한 대추야자, 바나나 나무와 닮은 파초, 그리고 가장 높이 솟아있는 워싱토니아 로부스타. 


'워싱토니아 로부스타'라는 이름은 우연히 알게 되었다. 반려견 만수르(비숑 프리제, 당시 5세)와 아파트 단지를 산책하고 있는데, 화단에 있는 키 큰 야자수 기둥 옆에 거대한 똥을 쌌다. 똥을 줍기 위해 허리를 숙였는데, 야자수 기둥에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워싱턴야자', 그리고 영문으로 Washingtonia Robusta라고 적혀 있었다. 


워싱토니아에 대해 좀 더 알아보면 재미있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워싱토니아라는 이름은 미국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에서 나왔다. Asa Gray라는 식물학자가, 건국의 아버지이자 원예와 농업에 조예가 깊었던 워싱턴 대통령을 기리기 위해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멕시코 북서부가 원산지인 워싱토니아는 필리퍼라Filifera라는 종과 로부스타Robusta라는 종으로 나뉘는데, 제주에 있는 종은 거의 로부스타다. 


'강건한'이라는 뜻의 영단어인 'Robust'에서 알 수 있듯, 더 튼튼한 종이기 때문이다. 제주도처럼 겨울이 있는 지역에서도 버틸 수 있다. 줄기는 필리퍼라에 비해 가늘지만, 훨씬 높이 자란다. 35m까지도 자랄 수 있다고 한다. 아파트 10층 언저리 높이다. 로부스타의 잎사귀는 오래되면 갈변해 아래로 쳐진다. 낡은 잎사귀가 필리퍼라에 비해 떨어지지 않고 오랫동안 매달려 있기 때문에, 조금 지저분해 보일때도 있다. 그래서 해마다 6-7월쯤 되면 가로수들이 이발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인부들이 사다리차를 타고 높은 꼭대기로 올라가 낡은 잎사귀를 잘라 내는 작업을 한다.  


이런 특성들 때문에 제주도 지자체와 워싱토니아의 관계는 난처한 상황이다. 미관상 심었던 워싱토니아 가로수들이 벌써 2-30년이 되었다. 키가 너무 커졌고, 줄기는 노화되기 시작했다. 잎사귀를 관리하기도 쉽지 않다. 무엇보다도 여름철 태풍이 올 때 거대한 야자수가 꺾여 넘어지며 안전사고 위험이 커졌다.  


처음 이사 올 무렵, 서귀포 시청 2청사 입구에서 정말 키가 큰 워싱토니아 한 쌍을 보았다. 청사 건물보다 높게 솟아 신시가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말 멋진 듀오였다. 그런데 2019년 태풍 때 그중 하나가 꺾여버렸다. 그 이후로는 한 그루만 서 있고, 그 옆에는 친구의 밑동이 슬프게 남아있다. 


이런저런 이유로 제주도에서는 가로수로 심었던 워싱토니아들을 해변으로 옮기고 있다고 한다. 그 자리는 먼나무 같이 작고 안전한 나무로 바꾸고 있다안전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지만, 개인적으로는 너무 아쉬운 일이다. 물론 먼나무에게 딱히 악감정은 없다. 나는 먼나무와도 사이가 좋다. 하지만 야자수가 줄지어 선 도로를 드라이브하는 기분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사실 제주도는 야자수가 자라는 곳이 아니었다. 몇몇 선지자들의 피땀 어린 노력의 산물이다. 해외에서 야자수를 본 후, 고향인 제주도에도 심어야겠다는 결심을 한 것이다. 대표적인 인물이 한림공원을 만든 송봉규 회장님이다. 송 회장님은 일본 남부지방의 야자수 길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다. 그리고 제주도에 구현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1971년의 일이다. 9만 평이 되는 모래밭을 사서 10년 이상 공을 들였다고 한다. 그 자리가 지금의 한림공원이 되었다. 


그리고 30년이 지난 지금은, 제주도 어딜 가든 잘 자란 워싱토니아 로부스타를 볼 수 있다. 이런 걸 생각하며 야자수가 줄지어 선 일주서로를 마음 편히 달리다 보면... 조금은 미안할 때도 있다. 남을 위해 무언가를 일구는 것은 정말 무거운 일이지만, 남이 일군 것을 누리는 것은 너무 가볍기 때문이다. 공평하지 않은 느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더 큰 무게를 짊어지고 싶다는 욕심도 있다. 워싱토니아 로부스타는 그런 걸 일깨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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