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어딜 가든 5월이 되면 멋지지 않은 곳이 없고, 날씨가 험한 곳이 없다. 괜히 계절의 여왕이 아니다. 그렇지만 서귀포는, 그중에서도 단연코 최고다. 왜? 귤꽃이 피기 때문이다. 서귀포와 관련해 그런 이야기가 가끔 나온다. 5월에 귤꽃이 피기 시작하면 서귀포 어딜 가든 향기가 난다고. 과장이 아니다. 정말이다.
별로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감귤이라는 단어는 한자다. '귤 감(柑)'에 '귤 귤(橘)'이라고 한다. 귤을 뜻하는 순우리말은 따로 없다. (있나?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아무튼 귤꽃은 5월에 피며 온 서귀포를 향기로 물들이고, 6월이 되면 녹색의 열매가 달린다. 그 열매가 겨울까지 진녹색에서 연두색으로, 연두색에서 노란색으로, 노란색에서 귤색으로 조금씩 익어 가는 것.
내 경우 귤꽃 향기도 좋아하지만, 정말 좋아하는 자연의 향이 있다. 그 향은 특정 장소에서만 맡을 수 있다. (별 관심은 없겠지만) 구체적으로 알려 주자면 서귀포 신시가지에 위치한 LH1단지 아파트와 LH2단지 아파트 사이에 가면 된다. 두 아파트 단지 사이로 긴 내리막 도로가 있다. 도로의 끝을 바라보면 바다 위에 범섬이 떠 있는 게 보인다.
그 도로 양쪽에 심어진 가로수에도 5월이면 꽃이 피는데, 이 향이 뭐랄까. 비현실적으로 아름답다. 맡아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세상 근심이 사라지고, 인생을 낙관하게 되는 향이다. 대한민국에 사는 나이 40의 대머리 아저씨가 가로수의 꽃 향기를 맡으며 인생을 낙관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만큼 훌륭한 향이다.
자잘한 연녹색 잎사귀를 가진 평범해 보이는 나무인데, 조그만 꽃들이 덩어리로 모여 있다. 5월의 햇살을 받아 하얗게 빛난다. 어떤 나무인지 이름을 모르는 게 아쉽다. 아내는 라일락 향기 같다고 하는데, 라일락 향기를 맡아본 적이 없으니 확인할 수도 없다. 사실 라일락 향기라는 걸 맡아보려면 마트의 세탁 세제 진열장 말고는 어렵다.
찾아보면 우리나라 곳곳에 라일락 관상수가 종종 심어져 있다고 한다. 사실은 수수꽃다리라고 하는 한국 자생종이고, 진짜 라일락의 원산지는 유럽이기 때문에 라일락을 '서양 수수꽃다리'라고도 부른다고. 우리나라에 자생하는 털개회나무를 미국으로 가져가 개량한 종은 '미스김 라일락'이라고 한다. 다소 인종차별적인 표현이지만, 미스김 라일락은 라일락 중에서도 특히 인기가 많다고.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분꽃나무라는 종도 라일락과 비슷하게 생겼으며 좋은 향이 난다고 한다. 정향나무라는 종도 비슷한데, 정향나무는 라일락과 같은 수수꽃다리속이라서 향도 닮았다고. 인터넷을 한참 검색해 봐도 명쾌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서귀포 신시가지 LH1,2 단지 사이에 있는 보물 같은 스팟의 주인공은, 라일락일 수도 있고 정향나무일 수도 있고 분꽃나무일 수도 있다. 미스김 라일락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물론 굳이 더 피곤해질 필요는 없다. 이름 좀 모르면 어떤가? 뭔가를 더 알려고 하는 노력은 사실 별 쓸모가 없다. 요즘은 모든 정보가 모두에게 오픈되고, 심지어 AI가 척척박사처럼 알려주는 시대가 되었다. 사실 별 쓸모가 없다. 무언가를 더 아는 것보다는 무언가에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이 더 중요하다. 그게 더 행복해지는 확실한 길이다.
5월에 서귀포 신시가지를 지나칠 일이 있다면, 꼭 시간을 빼서 LH 사잇길을 찾아보시길. 향을 맡아보면 안다. 그럴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