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화장실에 갔다가 나오며 손을 닦더니, 손을 닦던 수건을 가리키며 나에게 물었다. 이 수건 언제부터 있던 거야? 한 때는 하늘색과 보라색의 사이에 있었겠지만, 지금은 한없이 회색에 가까워진 오래된 수건이었다. 대충 봐도 상당히 오래되었음을 직감했다. 나는 수건을 받아 들고 살펴보았다. 너무나도 가벼운 수건의 뒷면에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꿈★은 이루어진다 - 삼성중공업"
흐음...
나는 2002년 한일 월드컵으로 어림의 경계선을 긋곤 한다. 2002년에 응원을 해본 적 없는, 또는 태어난 적 없는 세대라면 확실히 어리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2002년을 겪은 사람이라면 역사의 일부분을 맛보았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숙명 같은 나이듦을 실감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다시 돌아와서, 새겨진 문구로 보아 수건의 연식은 최소 20년이 되었음을 확신했다. 아버지가 삼성중공업에 다니던 시절, 회사에서는 한 번씩 전 직원들에게 수건을 나눠 주곤 했다. 월드컵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모든 국민들이 고무되었던 그 시절에 회사는 수건을 주기로 결심한 것이다.
"이야~ 이게 아직도 있다니 대단한데?!"
나는 그렇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5년쯤 된 수건이라면 위생적으로도 그렇고 좋게 봐줄 수 없다. 하지만 20년을 견딘 수건이라면? 세균 번식을 넘어선 무언가가 담겨 있다고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20년을 살아남은 수건이라면 적어도 우리에게 일말의 교훈을 남겨줄 수도 있을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손에 마모되고, 걸레가 될 운명을 피하고, 갖은 이사에도 자리를 지킨 수건. 이렇게 세월이 흘러 거제도에서 진주로, 진주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광교로, 광교에서 판교로, 판교에서 제주 서귀포로. 거대한 여정을 함께한 수건이라면 거기에서 뭔가 배울 점이 있지 않겠는가.
"꿈★은 이루어진다 - 삼성중공업"
수건에 새겨진 문구는 너무 낡아서 거의 읽을 수 없을 정도로 희미해졌다. 하지만 메시지가 주는 감동도 괜히 뭉클했다. 꿈★은 이루어진다. 다시 보니 별표가 왜 굳이 저 위치에 있는지도 의아하긴 했다. 꿈은★이루어진다. ★꿈은 이루어진다. 꿈은 이루어진다★. 아무튼 뭉클했다.
자초지종을 설명하니 아내는 무심한 표정으로 한 마디 던졌다. 그렇다고 20년 된 수건을 쓰고 있으면 어떻게 해. 걸레로 쓰던지 버려. 하지만 나는 항전의 결사대가 된 기분으로. 삼별초가 된 기분으로. 명량해전의 이순신이 된 기분으로. 300의 마지막 장면을 사는 기분으로. 단호히 거부했다. 20년이 된 수건을 한 순간 버리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20년이면 삼성전자 주식이 (반토막 난 지금, 배당금을 제외하고도) 10배로 불어나는 시기다. 네이버와 카카오는 태어나지도 않았을 때부터 존재한 수건이다. 내가 머리카락이 있었을뿐더러, 아이롱 파마까지 시도한 시기다. 강산이 두 번 변하는 시기다. 적어도 지금은. 지금은 이 수건을 포기할 수 없다. 이렇게 된 이상 언제까지 견디는지 그 역사를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 나는 그런 기분이었다.
며칠 뒤, 나는 꿈★은 이루어진다 수건이 반으로 잘려 걸레로 쓰이고 있는 것을 목격하였다. 역시 아내란 무서운 존재다. 드라마 24에 나오는 잭 바우어 같은 냉혹한 결단력을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