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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비 Oct 05. 2023

혼자 보낸 추석

나는 새로운 삶보다 익숙한 불행을 택했다.

 시가에 전 부치러 가지 않아도 되므로 추석 전날 부리나케 부모님 집으로 달려갔다. 엄마는 묻고 따지지도 말고 밥부터 먹길 종용했다. 뜨끈한 곰탕 국물과 함께 비빔밥을 우걱우걱 씹어먹으며 남편의 어머니가 매번 아침밥 대신 유통기간이 한참 지난 요구르트를 줬던 기억을 떠올렸다.

     

내게 처음 할당된 노동은 콩나물 다듬기. 그동안 만난 콩나물 중에서 다듬기 난이도 상이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고작 그 일로 녹다운이 된 나와는 달리 엄마는 허리 보호대를 차고도 무수한 일들을 척척 해냈다. 신화적인 모성애에 대해 말하길 꺼리는 편이지만 엄마의 영역에 들어선 생명체가 내뿜는 어마무시한 에너지는 부정할 수가 없다.      


여느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추석 연휴를 보냈다. 아빠가 전국의 막걸리를 다 맛보겠다는 딸을 위해 엄선한 막걸리를 함께 맛보았다. 고령화 가족이 된 우리는 예전보다 먹고 마시는 양이 많이 줄었다. 매번 무엇을 먹을 때마다 정말 많이 못 먹는다며 모두가 한탄한다.    

  

남편 대신 아빠가 굽는 고기를 새끼 새처럼 받아먹었다. 고기를 좋아했던 남편을 위해 명절 때마다 고기를 먹은 탓에 안거미의 농후한 맛을 알게 되었고 그는 유령 같은 존재가 되었지만 우리는 올 추석에도 안거미를 구워 먹었다.

     

언젠가부터 마냥 편하지 않은 내 방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엄마의 촉촉해진 눈동자를 모른척하며 씩씩한 척 내가 사는 집으로 돌아왔다. 하루 만에 엉클어진 집안을 정리하고 갑갑한 마음을 둘 곳 없어 산책에 나섰다. 추석의 거리는 평소와 달리 낯선 사람들로 꽉 차 있었는데도 공기는 텅 빈 것 같았다.  

    

유난한 애정으로 똘똘 뭉치지도, 원수 같은 사이도 아닌 애정과 원망이 적절히 뒤엉킨 부모와 자녀 2명으로 구성된 4인 가구에서 자랐다. 명절에 제사를 지내지 않고 친척 집에도 가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누구도 여행 갈 생각은 하지 못하는 고지식한 우리는 언제나 명절을 함께 보냈다.   

   

추석 당일의 저녁, 혼자 거리를 걷고 있는 지금의 현실이 새삼 낯설었다. 보통 이 시각의 나는 술과 음식으로 꽉 찬 배를 움켜쥐고 소파에 널브러져 있기 마련이었지만, 올해도 우리 집으로 방문하는 큰아버지 내외를 피해 아침에 황급히 집을 빠져나왔다.     


한집에서 따로 사는 걸 뭐라고 구구절절 설명해야 할지 난감해서 그냥 이혼했다고 말하겠다 했을 때 전화기 넘어 망설이는 엄마가 느껴졌다. 그 뒤로 부모님이 어떻게 대처했는지 모른다. 다만, 나의 상황을 부정하고 싶은 부모님을 확인했을 뿐이다.   

  

결혼 전엔 가족, 아니 정확히는 아빠에게서 미치도록 벗어나고 싶었다. 내 가정을 만들면 자유로워 질거라 생각했지만, 막상 결혼하고 보니 친정, 시가, 남편 그 모든 가족의 형태에서 떨어져 나와 혼자 살고 있고 싶을 때가 더 많아졌다.   

  

남편 역시 그의 가족에게서 도망쳤다. 그렇게 찾아낸 우리의 도피처에서 그는 또 다른 도피처를 찾아 헤매고, 나는 도망치기만 하는 삶은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새로운 삶보다 익숙한 불행을 택했다. 이번엔 이 자리에서 내 행복을 남편에게 떠넘기지 않고 혼자 일어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무리 속 히잡을 쓴 여자가 여기서 살고 싶다고 말하며 웃었다. 행복해 보였다. 이곳에 사는 내가 행복하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어쩌면 지금 이대로 완전하다는 말은 사실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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