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비 Sep 27. 2023

어느 날 집어온 막걸리 한 병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요즘의 외출 동력은 막걸리다. 산책이 귀찮은 날에도 밖을 나가면 막걸리를 사 올 수 있다는 조금 설레는 맘이 되어 집을 나서게 된다. 매번 막걸리를 사가는 걸 기억할까 봐 일부러 집에서 먼 마트나 편의점에서 사기도 했지만, 슈퍼 사장님은 알 것이다. 저 여자가 막걸리 중독자라는 것을.     


맥주가 당기지 않고 소주는 비위가 상하고 와인은 뒤끝이 안 좋고 위스키와 보드카는 독하고 달콤한 술은 싫었던 어느 날, 못 미더운 막걸리를 속는 셈 치고 집어 왔다.      


마냥 쓰지도 많이 달지도 않은 적당한 탄산을 머금은 부드럽고 편안한 목 넘김. 술 자체의 포만감이 커서 안주가 필요 없고, 750ml짜리 1병을 다 마시면 배불러서 절로 절주가 된다.(하지만 750ml를 다 마시면 이미 절주가 아닐지도) 게다가 상당히 저렴하다. 그동안 그토록 찾아 헤맸던 술은 바로 막걸리였다.     


할아버지들이 편의점 야외 테이블이나 공원 벤치에 삼삼오오 모여 마시는, 매일 밤 위스키 한잔하고 잠든다고 말할 수 있어도 매일 밤 막걸리 한 사발 하고 잔다고는 말하고 싶지 않은, 어딘가 폼나지 않는 그 술.    

 

하지만 막걸리 사랑은 멈출 수가 없었고 마침내 엄마에게 부끄러운 듯 털어놨을 때, 큰아버지랑 똑같다고 말하는 그녀의 조소 품은 입술을 보았다. 그렇다. 엄마와 내가 제일 싫어하는 큰아버지의 최애가 바로 막걸리인 것이다. 제기랄, 피는 속일 수 없다더니. 나는 그녀의 의중을 모른 채하며 이제부터 세상의 막걸리를 한 병씩 맛보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엄마가 째려보았다.


나는 나의 취향을 알게 된 사실을 매우 놀라워하고 있다.     


최근에 막걸리 대신 맥주를 마시다가 깨닫고야 말았다. 아니, 뭐야 더럽게 맛없잖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다시 한 모금 삼켜보았지만, 결과는 같았다. 입맛이 변한 건지, 아니면 원래 입맛을 되찾은 것인지 헷갈렸다. 그러고 보니 맥주를 막걸리만큼이나 맛있다고 감탄하며 마신 적이 많았던가? 게다가 맥주는 유독 가스가 잘 차는 내 속을 더부룩하게 만들었고 무엇보다 뒤끝이 매우 안 좋았는데 왜 그걸 이제야 인지하고 이렇게 화들짝 놀라는 것인가.      


남편이 맥주를 엄청나게 좋아했다. 내게 맥주는 회식 자리에서 소주를 대체할 수 있는 술, 혹은 친구들과 부담 없이 마실 수 있는 술에 불과했었지만, 그 사람과 살면서 맥주를 좋아하게 된 줄 알았다. 하지만 알았다. 난 맥주를 좋아하진 않는다.      


문득 예전으로 돌아간 느낌이 스쳤다. 그때는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는 명확히 알고 있었다. 이런 외골수적인 기질은 종종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었고 나는 눈에 띄지 않으면서도 언제나 무리에서 튀는 사람이었다.       


밥벌이하는 동안 그 기질은 상당히 쪼그라들었으나 그건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참아내는 것이었으므로 여전히 나는 서툴렀고, 남편에게만은 기꺼이 맞추고자 하는 마음으로 살았음에도 이 관계 역시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되었다. 그렇게 서서히 나라는 사람을 잘 모르게 된 것 같다.      


결국, 맥주를 기꺼이 함께 마시면서도 막걸리도 즐기는 일은 잘 해내지 못한 듯하다. 지금껏 꽤 잘 해낸다고 믿었기에 나를 잃지 않으면서 사람들과 합을 맞춰 살아가는 일을 여전히 더럽게 못한다는 그 사실은 나를 오도 가도 못하게 만들었다.      


예전보다 가진 것이 많고 잃은 것도 많은 사람이 되어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다시 20대가 된 40대의 나는 조금의 설렘과  끝없는 막막함을 느낀다. 막걸리 750ml 한 병으로 말이다.           

이전 02화 남편 대신, 인형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