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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비 Sep 22. 2023

남편 대신, 인형

인생은 막장 드라마 일지도

침대 위에 상어 인형이 누워있다. 그것은 지느러미를 내려놓고 입을 벌린 채 세상모르게 자고 있다. 뻗어 누운 자태가 몹시 귀여워서 인형을 보려고 일부러 침실에 들어갈 때도 있다. 나의 처량함에 웃음이 튀어나왔다. 인형이 남편의 자리를 차지한 지금의 상황이 마치 시트콤 같아서다.      


상어는 몇 년 전, 언니에게 주었던 선물이다. 싫증을 잘 내는 언니의 사랑은 찰나였고 상어는 내 방 침대에 덩그러니 놓여있게 되었다. 그 상어를 집에 데리고 왔다. 고백하건대 남편이 있었다면 집으로 데려오진 않았을 것이며 상어와 나를 동일시했다는 사실도 부인하진 않겠다.      


인형을 안 좋아한다. 어릴 적에는 생명체의 모습을 한 그것이 언젠가 살아 날뛸 것 같아 무서웠다. 한때 남자친구가 준 인형은 굴렁쇠라는 이름까지 지어주고 애지중지했으나 헤어졌을 때의 처리 방법이 곤욕스러웠다. 인형은 버릴 때 미안해졌다.    

  

그랬던 내가 근 20년 만에 직접 인형을 집으로 데리고 온 것이다. 이제 상어 인형은 그 보드라운 털이 남아나지 않을 때까지, 옆구리가 터질 때까지 나와 살게 될 거라는 뜻이다. 하지만 상어에게 이름도, 성도 부여하지 않았다. 특정 관계에 얽매이는 것도 싫다. 나는 그저 나, 너는 그저 너로 남기로 했다. 뭐 이딴 이야기를 이렇게 진지하게 하고 있는지.


어쨌든 인형의 포근함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자던 손은 어느새 상어 지느러미를 조심스레 쥐고 있다. 우리 강아지 쫄랑이가 그의 애착 곰돌이의 목덜미를 아플까 봐 언제나 살짝 물고 옮겼던 것처럼. 상어는 품에 안고 두 다리에 끼웠을 때 꼬리가 무릎에 닿아서 내게는 안성맞춤이었다. 이가 없어 잇몸으로 사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구나.      

지난 일 년간 남편은 늦은 밤이나 새벽에 귀가했는데 최근엔 일찍 들어오고 있다. 도대체 어디서 시간을 보내는 것인지 불안했던 나는 이제 ‘뭐지? 애인이랑 헤어졌나?’ 같은 생각을 하면서 피식 웃는 지경에 이르렀다.      


작년의 오늘 자 일기에 나는 ‘숨이 제대로 안 쉬어진다.’라고 적어놓았는데, 오늘의 나는 그가 집에 일찍 들어오는 것에 숨이 막혔다. 나의 인생은 감성 드라마에서 시트콤 드디어 막장 드라마로 흘러가고 있나? 하지만 나는 이 막장 드라마로 흘러들어오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다.    

  

예전에는 새벽에 귀가한 만취한 남편이 노래를 흥얼거리면, ‘유흥주점에서 문란하게 놀던 흥을 집까지 끌고 와서 보란 듯이 흥얼거리는 것은 나를 철저히 무시하고 모욕하기 위함이다!’라고 판단하고 분노했다. 하지만 지금 내 눈앞의 진실은 ‘새벽에 귀가한 남편이 노래를 흥얼거린다.’ 정도인 것이다.      


그가 어디서 술을 마셨는지, 문란하게 놀았는지, 술에 취한 건지, 나를 무시하고 모욕하기 위해 노래를 흥얼거렸는지, 나는 알 수 없다. 그건 단지 내 생각이 만들어 낸 상상에 불과한데, 줄곧 내 생각에 분노했고 상처받았다.


이 훈련(?)을 끊임없이 했다. 부지불식간에 튀어 오르는 생각을 막을 길은 없어도 일렁이는 마음을 되짚어 보면 거기에는 항상 나의 망상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 방법을 남편과의 관계에만 써먹지 않고 두루두루 사용하는데 사는 것이 한결 수월해졌다.     


그래서 ‘뭐지. 애인이랑 헤어졌나?’라는 나의 상상을 유머로 받아칠 수 있게 되었다. 그에게 실제로 애인이 있는지 없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로 인해 내 생활에 지장이 생긴 것이 더 중요하다.


이렇게 된 건 그를 향한 내 마음이 덜어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 그 덜어낸 마음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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