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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비 Oct 24. 2024

무료하고도 당연한 눈빛으로 불행을 말하는 사람

4화

 살림살이들을 간결하게 갖추고 집안을 깨끗하게 유지하려고 애썼다. 야근으로 녹초가 되었어도 가스레인지와 타일 벽은 반짝이는 상태로 만들어놔야 뒤가 찜찜하지 않은 기분으로 잠들 수 있었고 모든 것이 원래 그 자리에서 태어난 것처럼 견고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모습을 보면 안심되었다. 아무리 애써도 어긋나기만 하는 결혼생활에 비하면 의지대로 통제되는 집안일은 확실한 보상을 안겨주었다.     


-너와 사는 건 불행해.     


  J는 무료하고도 당연하다는 눈빛으로 불행을 말했다. 지구가 둥글고, 태양이 뜨겁다는 것과 다를 바 없이 자신의 불행을 말했다.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잘도 저런 말을 지껄인다고 생각했다. ‘너와 사는 건 불행해’라니. 영화배우가 내뱉을 법한 대사 아니던가. 불행한 남자 역할에 흠뻑 도취된 꼴이 같잖았다. 네가 불행이 뭔지, 그 뜻이 뭔지 알기나 해? 취기가 한껏 오른 그가 시뻘건 두 눈을 부릅뜨고 이렇게 사는 건 인생을 좀 먹는 일이라고 말했을 때도 전국 노래자랑에서 막춤을 추는 젊은 여자를 보는 것처럼 민망하고 부대꼈다. 

 죽으면 고통도 끝날 거라 믿는 사람들처럼 나에게서 벗어나면 행복해질 것이라 믿는 그의 가벼운 믿음이 같잖고 부러웠다. 20년 동안 불행해서 떠나고, 떠나고 나서도 불행해서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와 또다시 좀처럼 좀 먹는 타령을 멈추지 않는 J를 볼 때마다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번에 J가 말한 불행은 내가 20년간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집에서 쉰 지 정확히 1년째 되던 날 찾아왔다. 갚아야 할 빚이 없었고 몇 년 동안 버틸 현금이 있었다. 몇 년 쉰다고 해서 당장에 생계가 무너지는 일은 발생하지 않을 터였다. 그래. 나는 모멸감으로 점철된 회사생활을 더 버티느니 남편 돈으로 살림하는 팔자 좋은 여자로 남은 생을 버티고 싶었다. 이런 내가 버틸 수 없는 불행이었나. 

 다시 아침이다. 왜 이렇게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이 찾아오는 것인지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다. 눈을 감고 생각이라는 것을 한다. 생각을 뻗쳐나가면 사지의 감각이 서서히 깨어나고 장기의 움직임이 활발해지면서 두 눈이 번쩍 떠지는 순간이 온다. 

 불판 위의 반건조 오징어처럼 춤을 추는 까만 남자를 생각했다. 162cm쯤 되는 남자는 다부진 체격으로 항상 몸에 착 달라붙는 나일론 반팔 티셔츠를 입었다. 해가 거듭될수록 배는 볼록해졌지만 남자는 자기 몸에 대한 자긍심이 있어 보였다. 푹푹 찌는 한여름에도 밥 말 리가 썼을 법한 알록달록한 털모자와 넥워머를 끼고 하렘팬츠에 무릎 밑까지 오는 등산 양말을 덧신었다. 이상한 것들의 조합이었지만 다부진 상체의 볼록한 배처럼 그의 패션은 멋지면서도 웃겼고 나중에는 자꾸만 보고 싶어 졌고 끝내는 멋있다는 생각마저 하게 되었다. 

 그를 처음으로 발견했던 곳도 마지막으로 본 곳도 모두 해변이었다. 처음엔 남자가 소변이 마려운 줄 알았다. 남자는 해변 중심부에 자리 잡고 서서 두 다리를 붙이고 무릎은 구부린 체 눈썹 앞머리를 올린 아련한 표정으로 리드미컬하게 허리를 움직였다. 양팔은 격정적으로 하지만 유연하게 강약을 조절해 가며 이리저리 휘저었는데 세상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장르였다. 그 춤사위를 본 지가 오래되었다는 생각을 했다. 남자는 여전히 해변에 출몰했지만 언젠가부터 춤을 추지 않았다. 갑자기 남자의 춤이 그리워졌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화장실로 들어갔다. 화장실 벽면에는 가로 7.5cm 세로 30cm 크기의 화이트 도기질 타일이 세로로 가지런히 붙어있다. 리모델링 업자가 뱉은 말 중에서 실력 좋은 타일공을 섭외했다는 말만은 진실이었다. 변기에 앉아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시공된 타일을 바라보고 있으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이 달아나서 멍하니 변기에 앉아 있곤 한다.

 그곳에는 실처럼 가는 다리를 가진 거미가 살고 있다. 이사 온 첫날부터 그들의 존재를 알고 있었지만 대체로 죽이지 않고 바라만 보았다. 그러다 아무렇지도 않게 휴지로 짓이기거나 샤워기 물줄기로 급습해서 하수구로 빨려 들어가게 하기도 한다. 죽였다고 생각한 거미는 어느새 다시 살아나 화장실 구석에서 실 같은 다리를 꼼지락거리며 기어 다니곤 했다. 

 짓이겨진 거미가 이 화장실에서 거미로 환생하는 끝도 없는 생을 산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일처럼 여겨졌다. 죽는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을 것이다. 살아있을 때의 고통이 죽는다고 해서 없어질 수 있을까. 끊어진 생의 고통도 또다시 알 수 없는 형태의 고통으로 변하지는 않을까. 고통은 죽어버린 몸을 버리고 살아있을지도 모르는 영혼에 끈질기게 달라붙어 무엇으로 환생해도 끝까지 괴롭힐 것이 분명해 보였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느니 이 빈번하고도 익숙한 고통을 끌어안고 사는 것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라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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