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남편과 백신

백신이 주는 깨달음

by 윤비



모더나 백신 2차를 맞은 지 20일가량이 지났는데 아직 체력은 돌아오지 않았다. 에너지를 꾹꾹 채워 넣어도 밑 빠진 독처럼 술술 빠져나가는 걸 느끼며 평생 어딜 가도 하위 아니 최하위 체력을 유지했던 나는 덜컥 겁이 났다. 평소의 체력보다 더 떨어진다는 것은 정상생활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알다시피 백수인 나는 하는 일이라고는 밥 먹고 노닥거리는 게 전부인데 그 노닥거릴 체력이 없어 누워 있기만 하는 날들이 많아졌다. 억울해서 이를 꽉 물고 뜨개질을 했다가 코피를 쏟고 입술이 불어 터졌다. 그렇게 다시 몸져누워있기를 며칠째. 만약 내가 회사를 다니고 있었다면 어찌 되었을까 상상만 해도 몸서리 쳐진다. 백신이 나에게 이런 좌절을 맛보게 할 줄이야.


백신 1차를 맞았을 때는 몸살, 오한이 하루 만에 스치듯 지나갔는데 2차는 3일을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아팠다. 신체의 아픔이 주는 어찌할 수 없는 무기력함을 오랜만에 접하니 내 정신은 아이처럼 해맑아졌다.


1차 백신 때 알뜰살뜰 나를 돌봐주지 않았던 남편에게 심한 배신감을 느끼고 그에게 저주를 퍼부었던 터라 곁눈질을 해가며 내 상태를 살피던 그는 밤새 고열에 시달리고 숨쉬기 힘들어 끙끙대고 있는 나에게 '응급실 갈래?'라고 물었다. 나는 '응급실 갈래?'가 아니라 '응급실 가자'라고 말했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화를 내진 않았다. 그가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고 그의 최선이 이 정도인 것을 어찌하겠나.


나의 경험치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면 나와 함께 보낸 17년이란 경험은 그를 어떻게 만들어놓았을까를 생각했다.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건 그가 나의 엄마를 만나 무조건적인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건 나에게도 해당되는 말이기도 하다.


백신 2차를 맞았다는 것을 기억해 낸 엄마는 전화를 걸어왔다. 목소리만 들어도 대번 나의 상태를 알아챈 그녀는 혼자 끙끙 앓았을 내가 못내 안타까워 눈물이 난다 했다. 아프면 전화하지 그랬냐는 물음에 이젠 괜찮다 살아났다 걱정하지 말란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해서 말했다.


다 커서 아니 이제 늙어가는 40살 딸이 노인이 되어가는 엄마에게 아프다고 징징거릴 수는 없었다. 정작 엄마가 아플 때 나는 무엇을 했나 내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 내가 나 아파 죽겠다고 연락하는 것은 낯부끄러운 짓이었다. 그동안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 사실이 내 맘을 아프게 한건 웃기게도 나와 똑같은 남편을 경험했기 때문이었다. 그제야 나는 평생을 혼자 아팠을 엄마가 눈에 보였다.


엄마 남편, 나의 아빠 또한 자신의 아픔밖에 모르는 사람이라 주로 같이 살고 있는 언니가 엄마의 상태를 주시하고 있지만 엄마는 본인의 아픔을 숨기다가 혼자 몰래 병원을 가버린다. 반면 남편의 부모님들은 조금이라도 아프면 새벽부터 전화를 해 병원에 데려다 달라 난리가 난다. 그러면서도 본인 아들이 아픈지 어떤지는 관심이 없다.


유별한 엄마 사랑을 받고 자란 나도 부모의 아픔에 무심한 인간으로 자랐고 자신들밖에 모르는 부모 밑에서 자란 남편도 무심한 인간으로 자란 것을 보면 결코 경험으로 사람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분명한 건 결국 사랑을 받은 자는 그 사랑을 깨닫는 날이 온다는 것이고 그것이 결국 사람을 바뀌게 한다는 사실이다.


나의 남편을 포함한 우리 가족, 우리 관계의 큰 버팀목은 나의 엄마에서 우리의 엄마가 된 윤인순 씨 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녀의 희생이 바탕이 되는 이런 관계가 비겁하다는 것을 알기에 언제까지나 그녀에게 기댈 수 없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동시에 언제까지나 내가 기댈 수 있는 엄마가 있기를 바라기도 한다. 내가 어미가 아닌 자식의 입장으로 평생을 살기로 다짐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애를 낳아보지 않아도 엄마의 세월이 얼마나 힘들고 외롭고 무서웠는지는 안다.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에서 엄마만큼 살아낼 수 있을까로 변하기까지 오랜 세월이 걸렸지만 말이다.


언젠가 엄마가 내게 기대는 날들이 오면 그녀가 나에게 준 넘치는 사랑으로 나 역시 엄마를 기대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리라는 것 또한 나는 알고 있다.


작가의 이전글주식이 휩쓸고 간 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