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끝나간다.
밤공기가 차가워졌다. 덜컥했다. 이제 선풍기를 틀고 잠들지 않고 매미들의 구애 소리도 조금 지친 듯 힘이 빠진 것 같다. 결국 아무 성과 없이 죽는 매미들도 많겠지.
최선을 다해서 울어대는 벌레들의 합창을 듣고 있으면 내가 벌레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간혹 들었다. 나도 땅속에 몇 년 있다가 여름 한철 밖에 나온다면 저렇게 할 수 있으려나.
새벽 5시만 되면 짹짹 삐로롱 거리는 새들은 밤사이 침범당했을지도 모르는 본인의 영역을 지키려고 저렇게 소란스럽게 운다고 했다. 자고 일어나자마자 치열하게 삶의 터전을 지켜야 하는 심정은 어떤 것일까.
나는 딱새(주로 아파트 화단 낮은 나무 사이에서 발견한다)를 좋아하는데 사는 곳이 꼭대기층이다 보니 까마귀나 까치가 옥상으로 날아온다. 뒷 베란다 옥상에는 까치가, 앞 베란다 옥상에는 까마귀가 오는 것만 봐도 새들의 영역은 확실해 보인다. 까마귀는 생각보다 몸집이 커서 날개를 펼치고 날아드는 모습을 보면 나도 모르게 몸을 움츠린다. 개로 치자면 까만 레브라도 느낌이다.(*참고로 딱새는 갈색 포메라니안 느낌)
나는 내 영역을 지키려 새벽마다 소리 지르지 않아도 된다. 그저 소파에 누워 까마귀들이 오면 반갑게 인사한다. 간혹 까마귀들이 에어컨 실외기 위에 앉으면 소리 지르며 달려가긴 한다. 까악.
벌레, 새, 사람 모두 제 영역을 만드는 것이 기본일지도 모른다. 모두 자신의 영역을 만들고 산다는 것이 용하다. 그 와중에 새끼까지 깔려고 한다. 나는 새끼는 까기 싫지만 본능적인 목표가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생각을 생각하는 것에 지칠 때면 그렇다. 그저 먹고 자고 싸는 것만 생각하면 좋겠다.
여름의 끝물, 또다시 무기력해졌다. 아무것도 못할 것 같은 기분에 휩싸이면 마치 죄를 짓고 있는 것 같다. 그럴 때 나는 벌레보다 못하다는 생각을 한다. 가끔 무기력해도 괜찮다는 보들보들한 생각으로 애써 정당화한다. 언젠가 내 영역에 변화가 생기거나 위험을 느낄 때 나는 무기력했던 과거의 나를 부러워하겠지.
다시 커피를 내려 마시기 시작했더니 활기가 돈다. 해답은 의외로 이런 것일지 모른다. 내친김에 달려 나가서 복숭아를 사 왔다. 과일을 별로 안 먹는데 여름의 복숭아만은 꼭 사 먹는다. 엄마가 나를 가졌을 때 복숭아가 그렇게 당겼다더니 그때의 맛이 뇌리에 남은 걸까.
9월이면 퇴사 한지 1년이 되는데 아직 엄마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계속 거짓말을 하고 산다. 거짓말은 끊임없는 거짓말을 불러와서 이제 말할 타이밍을 잡지 못하겠다. 평생 주부로 산 엄마는 딸들은 직업이 있다는 걸 자랑스러워했기 때문에 내게 실망할 것 같아서 두렵다. 엄마가 내게 실망하고 그런 엄마에게 내가 실망을 느낄까 봐.
언제나처럼 실제로 일어나지도 않는 일인데 나는 나의 추측에 확신을 하고 아무것도 시작하지 못한다. 평생 가장 많이 한 짓이다.
여름은 지나가고 반드시 가을과 겨울이 올 것을 알면서도 나는 여름이 지나가지 않기를 바라고 앉아서 아직 오지 않을 새벽녘의 차가움에 몸서리친다. 멍청한 짓은 좀처럼 벗어날 수가 없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