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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풀빛푸를은 Sep 23. 2021

오후 4시의 분 꽃

요즘 왠일인지 너무 피곤하고 아무것도 하기 싫다. 그저 늘어져 있고만 싶다. 아무것도 하기 싫고, 의욕도 생기질 않는다. 집은 어지러져 있고, 아이들 밥은 겨우 겨우 챙겨준다. 끼니를 해결하는 일이 하루의 가장 중요한 일이 되었는데, 우리집 냉장고는 뭔가로 가득 차 있건만 늘 먹을 만한 것이 없다 느껴지는 이유는 내가 살림을 못하기 때문이겠지.

아이들 밥을 차려주고 나면 숙제 하나 끝낸 것 같다. 그래도 어릴적엔 옆에서 먹여주거나, 일일이 챙겨주어야 했지만, 요즘엔 좀 컷다고 밥만 차려주면 알아서 먹는다. 그게 어딘가. 무척 감사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늘 끼니를 때우는 것이 왜이렇게 큰 일 같은가.

추석이다. 우리 가족은 재작년부터 조금씩 해체되는 분위기다. 재작년엔 시어머니가 입원하셨고, 작년엔 아버님이 갑자기 돌아가셨다. 두 분다 코로나19라는 거대한 인류의 대 전환기 속에 불행이 겹쳤다고 할까. 어머님이 입원하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코로나19로 인해 면회가 금지되었다. 파킨스 병에 알츠하이머까지 겹쳤는데, 면회가 안되어 자식들이 찾아가지 못하는 것을 잘 이해하지 못하셨다. 코로나19가 심각해졌고, 모든 삶은 단절되었다. 어머니와 가족들간의 끈도 끊어졌다. 그것을 알턱 없는 어머니는 가족이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하여 곡기를 끊으셨다. 결국 아무것도 못 드시게 되어 콧줄을 하게 되었다. 그 소식을 들은 나는 너무도 슬펐다. 그게 작년의 일이다. 작년엔 나의 삶도 핍폐했다. 아이들 셋은 학교에 6개월이 넘게 가지 못했고, 그 중 한명은 발달장애아이이다. 집 밖에 나가면 코로나에 걸린다는 두려움 때문에 목련이 환하게 피고 지는 것도 놓쳐 어느날 문득 밖에 나가보니 목련 잎이 갈변하여 떨어져있었다. 봄을 도둑맞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해 가을 아버님이 갑자기 돌아가셨다. 아버님이 돌아가시자 어머님 생각이 제일 먼저 났는데, 병원에서 남편이 먼저 떠난 것을 모르고 하염없이 기다릴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렸다. 그 슬픔을 때때로 어찌 감당하실까. 어머님은 아실까? 아직 모르실까? 그 뒤로 1년이 흘렀다. 어머님은 아직도 병원에 계시지만 나는 오래동안 면회를 가지 못했고, 건강은 하루 하루 살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좋지 않다.

작년 추석에도 시댁에 가지 못했지만 올 해도 가지 못했다. 이 곳은 제주도라서 시댁에 가려면 아이들을 데리고 비행기를 타고 또 공항에서 지하철을 1시간 넘게 타고 들어가야 한다. 제주도 사람이 된 나에게 (내려온지 6년밖에 안되었지만) 육지는 멀게만 느껴진다. 더군다나 코로나19 상황도 갑자기 악화되어 4단계 시행중이라 올 해 추석에는 그냥 집에서 보내기로 했다. 그냥 가족끼리 지내려니 추석 전날에도 아무 일이 없고, 추석 당일에도 추석인지 아닌지. 그냥 쉬는 날인지 느낌이 없었다. 그런데 왜이리 어머님과 아버님 생각이 많이 나는지. 추석 전에 시댁에서 음식하는 것이 그렇게 싫고 귀찮았는데, 이젠 그때 했던 음식들이 하나 둘 생각이 난다. 고사리, 시금치, 도라지를 무쳤던 일이며. 생선을 굽다가 어머님께 너무 자주 뒤집는다고 혼난 일. 호박전을 부치다가 다 태워먹은 일.

추석 아침에는 명절인데 아무 음식도 준비안한 게 아이들에게 미안해서 동네 마트에 가서 호박과 동그랑땡을 사왔다. 호박전과 동그랑땡을 부쳤는데, 전이 있어도 예전만큼 추석 느낌은 나지 않았다. 그냥 쓸쓸했다. 있을 떄는 귀찮고, 없을 때는 생각나는 것이 명절인가. 아니면 가족들이 모여 북적였던 것이 그리운 것인가.

오늘도 역시 아무것도 하기 싫어서 아이들 밥만 겨우 차려주었다. 설겆이는 미뤄놓았다가, 다음 밥을 차릴때 한다. 그리고 방에 아무것도 하기 싫다며 무기력하게 누어 있었다. 그러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는데 잠을 자면서도 일어나야지 일어나야지, 할일이 많은데 하면서 자꾸 잠의 나락으로 빠져드는, 그리고 일어나기 싫은 묘한 기분을 느끼며 잠자기를 계속 청하다가, 5시 30분이라는 시각을 보고 일어났다.

아, 또 저녁때구나.

명절 마지막 날인데 역시 아이들에게 뭔가 명절 분위기를 나게 해줘야 할 것 같아서 다시 마트로 향했다. 터덜 터덜 길을 걷는데 갑자기 어딘선가 미묘하게 꽃향기가 코를 훅 스치고 지나간다. 마치 꽃향기의 선이 가느다랗게 지나가고 있는데 그 선을 스치고 지나간 느낌이다. 다시 뒤로 몇 발자국 왔다 갔다 하며 무슨 꽃 향기인지 가만히 느껴보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자줏빛 분꽃이 환하게 피어 있었다.

아, 오후 4시면 된다는 분꽃. 이 꽃이 또 나에게 묘한 감정을 일으키는데, 옛날에 시계가 없던 시절에 분꽃이 피면 저녁할 시간이라고 알게 되었다고 한다. 분꽃은 4시가 되면 핀다고. 늘 밥을 해야 하는 엄마들에게 얼마나 고달픈 신호였을까? 아, 또 4시구나. 저녁밥을 지어야겠다.

분꽃 앞에 쪼그리고 앉아 구경하는데, 가을이 깊었는지 씨가 맺혀있다.

분꽃 씨 몇알을 톡톡따서 주머니에 넣는다. 오후 4시에 피는 분꽃을 우리집 베란다에 심어야겠다.

마트를 가면서 간혹 주머니에 손을 넣어 분꽃 씨앗을 만져 보았는데, 주머니 속에서 또르르 또르르. 굴러다니며, 어디론가 가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분꽃 씨앗들이 귀여웠다. 제발 오늘은 잊어버리지 말고 집에 들어가기 전에 분꽃 씨앗을 베란다에 뿌려야지 하면서 마트에 다녀왔는데, 지금 새벽 4시.

아직도 주머니 속에서 쫑알 쫑알 모여 있다. 분꽃 씨앗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아니면 잠들어 있을지도. 내일은 아이들이 학교에 가니, 늦지 않게 학교에 보내려면 이제 잠자리에 들어야겠다.

이렇게 추석 연휴가 끝나간다. 올해는 그저 쓸쓸한 추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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